<My Utmost for His Highest>=====:

내한성 일년 식물들 [하나님의 일꾼] /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9. 30. 12:31

3. 내한성 일년 식물들  하나님의 일꾼/챔버스의 글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 73:4).

           내가 내한성 일년 식물들(hardy annuals)이 말할 때의 그 의미는 건강한 정신을(healthy-minded) 지닌 죄인들을 말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잃어 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잃어 버린 자라는 용어의 의미를 너무 한정시키거나 전문화 시킴으로써 선교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푹 빠진 몹쓸 죄인들만을 잃어 버린 자로 여기게 되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리새인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인 바울이 건강한 정신을 가진 활기가 넘치는 이방인들과 대면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셨다. 당신도 이런 사람들과 접해야 한다. 그들은 한 번 태어난 사람들이며 한 번 태어난 것으로 완벽하게 만족한다. 그들은 대체로 바르고 도덕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매우 밝고 행복하다. 당신은 그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우리 주님의 삶의 주변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육신 안에 계실 때 우리 주님은 거의 대부분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셨다. 그러나 간혹 이방인이 끼어들 때가 있었고, 예수님은 그때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셨다. 주께서 종교적인 유대인들을 대하실 때는 근엄함이 있었다. 그러나 헬라인을 접하실 때는 즉시 헬라인의 날카로운 기지를 읽으시고 거기에 따라 상대하셨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주께서 혼자 계시고 싶으셔서 두로와 시돈의 해변 지방으로 떠나시는 내용이 나온다. 주님은 너무나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제자들을 파송하고자 하셨다. 그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불쑥 나타나 주님께 부탁을 했으나 주님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예수님은 조용히 있고 싶으셨고 또 무엇을 하시든지 이 여인은 주께서 감당할 수 없을만큼 소문을 낼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강했다. 그녀는 주 예수님을 붙들기만 하면 주께서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주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보자. 예수님이 그녀에게 격언을 하나 말씀하시고 그녀도 격언으로 주께 답변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15:26-27).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여인의 사고 방식은 생소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즉시 이해하셨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15:28).

           건강한 정신을 가지려는 경향은 오늘날 매우 강하다. 유니테리언의 얄팍한 사상은 정신 건강을 말한다. 신 사고 운동(New Thought Movement), 정신 치유 운동(Mind Cure Movement), 크리스천 사이언스도 정신 건강을 설명한다. 정신 건강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이 어떻게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올바를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 주님은 한 번 태어난 이러한 사람들을 잃어 버린 자라고 규정하신다. 하나님의 일꾼인 우리의 문제는 행복과 건강한 정신을 누리는 이러한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예수님을 원하는 자리로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한창 바쁜 시간을 마친 주님을 찾아 왔다. 당신은 이러한 건강한 정신의 무리들이 종종 당신이 기진맥진하였을 때 찾아와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같은 일을 당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 17:18).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꾼은 누구나 그를 바보처럼 느끼게 만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반드시 만난다. 그들은 당신이 아는 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올바른 삶을 산다. 그들은 당신이 답변할 수 없는 그러한 질문들을 던져 당신을 낭패에 빠뜨린다. 그들은 당신 스스로 참으로 어리석다고 느끼도록 만드는데 성공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지 못하며 당신도 그들의 삶 가운데 특별히 지적할 것이 없다. 그들은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행복하다. 그러나 철저한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내가 할 바를 정확하게 다하고 있다. 나는 불량배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정말 지독한 바보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 주님을 전할 수 있을까?

           세 부류의 이교도, 즉 갈리오와 헤롯과 빌라도를 살펴보자. 갈리오는 바르고 의로운 일반 이교도다. 사도 바울이 그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 18:17). 그의 요지는 나는 너희의 종교적 논쟁과 무관하다. 나는 너희의 율법 문제나 해결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대적자들은 약하지 않다. 그들은 우리를 무시할 수 있는 대적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복음을 전하는지 점검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바르고 의롭지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이런 종류의 이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만 외친다면 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일꾼인 우리가 마음과 생각에 가장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하되 어떤 한 부분만 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12:32)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애지중지하는 교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건강한 정신을 가진 무리들이 나를 또 한번 더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즉시 뭔가 발생한다. 즉 내가 할 수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째 사항은 우리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론이 아무리 옳고 진실하고 중요한 교훈이라도, 또는 아무리 우리 주님의 사역으로 만들어진 실제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우리가 제시할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빌립이 예수를 전하니 ( 8:3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위대하고 웅장하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알았기 때문에 아테네의 철학자들의 세련된 조롱을 맞설 수 있었다. 반드시 일반 이교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제시하라. 당신이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제시들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꾸러미 묶음으로 제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구절의 꾸러미 묶음을, 어떤 사람은 성화라는 꾸러미를, 또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라는 꾸러미를 내어 놓는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러한 특정한 구절들을 사용해서 능력있게 영혼들을 구원한 체험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맨 처음에 지적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특별한 처방을 의지하는 즉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떠나실 것이다. 양심이 얼어붙은 사람이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이교도든 우리는 다루어야 하는데,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성령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님, 이 사람은 건강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고 그의 과거 경력도 깨끗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를 다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제시해주고 성령께서 그를 다루시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또 다른 종류의 이교도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헤롯이다. 헤롯은 희귀한 타입의 이교도다. 그는 외설적이며 악하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악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대면하여 만났지만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그는 이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목소리가 잠잠해지도록 세례 요한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헤롯은 부도덕으로만 가득한 굳어버린 끔찍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사망 진단서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그의 양심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을 통해 그의 삶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반복하여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패역을 고집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교감을 완전히 말살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앞에 섰을 때도 그는 조금도 마음의 가책이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었는지 유의해서 보았는가?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 23:8). 왜 그렇게 기뻤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님께 물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 23:9).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요일 5:16). 하나님으로부터의 마지막 배교까지 이르는 영혼이 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불멸의 영혼이 멸망의 날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그 영혼을 깨우실 수 없다.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6).

만일 당신이 이 문제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지금 부딪혀 보라.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마음의 가책을 느끼긴 하더라도 지금은 과거만큼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이는 당신의 문제다. 언젠가 지금만큼도 가책을 느끼지 못할 때가 찾아올 것이다. 한 때 헤롯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쁘게 들었다 ( 6:20). 만일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의 삶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듣지 않았다면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이제 하나님의 무서운 진리가 다 제시되어도 당신에게는 한낱 우스개로 들릴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선 멸망의 자녀를 일대일로 맞서는 것을 금하신다. 사람의 성품이 이처럼 굳어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을 위한 기도는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신다. 그러한 기도는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는다. 이 진리는 무섭고 떨리는 진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교도의 또 다른 부류는 빌라도다. 빌라도는 언제나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이교도를 대표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유의 사람들을 잘 안다. 이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사업의 유익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사업에 더 유리한 조건이 된다면 이곳 저곳 교회를 옮겨 다닌다. 거듭나지 못한 채 이런 심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라고 부른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세하면 내 유익을 위해 복음을 사용하겠다. 당신은 이러한 사람을 당신의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갈리오는 일반적 부류의 이교도로서 정신이 건강하고 활력이 있으며 힘이 있고 행복하다. 건강한 정신을 갖는 것은 옳은 것인가? 물론이다. 행복한 것도 옳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급한 새 사고 운동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있다. 만일 당신이 죄를 무시하라고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고통과 질병과 괴로움을 성공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다면 사람들의 귀가 당신에게 쏠릴 것이다. 잘못된 죄악들에 대해 장차 있을지 모를 심판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법을 말해 준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배우려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떻게 사람이 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 통증에 시달리는 몸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잘못된 과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를 들을 것이다. 지금 지적한 내용들은 다 맞으니 기록해두라. 이 세상 임금은 이런 식으로 구원한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구원하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라. 사람들은 주의 모든 축복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빼 먹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죄를 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주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음으로 죄를 잊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죄를 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사람을 가르치는가? 그 죄를 무시하라. 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스스로 자아 실현을 하라! 이것이 가능한가? 물론 가능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오랜 기간 죄를 짓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죄악된지를 잊게 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지를 잊은 사람이 그의 과거의 잘못을 섬광처럼 보여줄 주님을 만나 보려고 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사람의 눈을 열어서 자신의 잘못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후 그 잘못으로부터 그를 구원하여 주신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죄악을 무시함으로써 죄를 잊은 자리까지 왔다면, 과거의 죄악을 직면하지 않은 채 건강한 마음과 행복을 누리는 자리까지 와 있다면, 그는 이교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잘못을 보게 하실 것이며 그후 다른 영역으로 우리를 옮기셔서 그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원했다. 제자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경을 읽어보면 어떤 헬라인들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찾아 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12:21)라고 말했다. 이때 제자들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예수님께 가서 말씀 드렸다. 기독교 일꾼인 당신은 건강한 이교도 부류에 속한 사람이 당신의 집회에 찾아 온다면, 그들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의미인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를 설득하려 하겠는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빌립과 안드레가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하라. 그들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어떤 사람이 찾아오든 또는 말로 하던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라고 할 때 첫째는, 둘째는, 셋째는 하는 식으로 시작하지 말라. 예수님께 가서 말씀 드리라. 주님, 이 사람들이 주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다시 첫째 핵심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 당신이 아는 가장 실제적인 분으로서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들과 인간들의 사실들 속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주의 일꾼들에게 그 어떤 진리로도 흔들 수 없는 내한성 일년 식물들, 항상 밝고 명랑한 얼굴을 하며 어떤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내한성 일년 식물들을 바꾸어 내시는 유일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기억하게 하시길 바란다. 사람들은 오늘날 인생을 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제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한다. 물론 어렵다. 참으로 어려워서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모든 인생의 삶 가운데는 위기가 찾아온다. 시편 107편은 완전히 절망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인생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절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때 주께서 그들을 들으신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악하게 되기 보다 선하게 되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악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다. 만일 당신의 종교가 당신이 아는 바 가장 낮고 가장 악하고 가장 비참한 지경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갈 수 없다면 당신의 종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많은 멋진 세상 종교들이 가장 악한 사람들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단지 교양있는 사람들과 지성인들만 상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지극히 낮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높은 곳까지 전부 상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움은 현실을 그대로 다 받아 주신다는 점이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모든 삶의 해답이시다. 다음에 당신이 내한성 일년 식물들을 만나면 그 하나를 놓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할 수 있을 때까지 매달리라. 그러면 한 영혼의 얼굴색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삶이 바뀌는 현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출처:

[스데반 황 목사님의 블로그=http://blog.naver.com/thebloodofx] 에서 인용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