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① 들어가며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1000개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버리며 살아간다. 문학은 바로 그 ‘나머지’의 소중함, 990개의 아름다운 꿈을 일깨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안타까이 사라져가는 그 모든 잠재적 가능성들이 곧 우리 자신임을, 문학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바로 문학이 아닐까.
① 들어가며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1000개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버리며 살아간다. 문학은 바로 그 ‘나머지’의 소중함, 990개의 아름다운 꿈을 일깨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안타까이 사라져가는 그 모든 잠재적 가능성들이 곧 우리 자신임을, 문학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바로 문학이 아닐까.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늘 반복됨에도, 그럼에도 문학은 왜 여전히 필요한 것일까. 사회적 가면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일에서부터 내 안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만나는 일까지…. 우리를 구원해줄 다정하고도 친밀한 문학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길을 떠나 보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글을 수집하고 탐독하며 그림과 음악, 그리고 자신의 마음 들여다보기로 세상을 읽어온 국문학 박사·문학평론가 겸 작가 정여울이 <오디세이>에서 <데미안>까지, 문학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시간 속으로 안내한다.
독일 남부 가이엔호펜에 있는 헤세박물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헤세. ⓒ이승원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해내는 누군가가 살고 있어.”
내가 힘들 때마다 마치 주머니 속 비상약을 꺼내 먹는 환자처럼 늘 되뇌는 문장이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런 문장에는 어떤 외부 에너지도 필요 없이 영원히 운동할 수 있는 상상의 발전기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힘이 나고,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처럼 막막한 순간에도, 영혼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이 초라해질 때, 남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내 사회적 가면을 치장하는 일이 참으로 고될 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나,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스스로를 지켜주는 또 하나의 내가 필요하다. 나보다 훨씬 지혜롭고 강인한 또 하나의 내가, 길을 잃고 휘청이는 내 손을 붙들어준다.
헤세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가이엔호펜의 정원. ⓒ이승원
문학 속에서 멘토를 찾는다는 것은 철부지 소년 싱클레어가 위대한 현자 데미안을 만나 마침내 그의 영혼을 자신의 존재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게 하는 과정과 닮았다. 내가 평생 애지중지해온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마치 싱클레어의 친구 데미안처럼 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어느 것이 원래 나인지 어느 것이 문학으로부터 스며든 에너지인지 알 수 없는, 경계 불분명의 상태가 된다. 나와 타인의 경계, 나와 문학의 경계가 지워지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다. 내가 문학작품을 읽고, 생각하고, 작품 속 주인공들과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내 고민을 털어놓는 동안, 내 안에는 수많은 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며 거대하고도 느슨한 공동체를 이룬다.
헤세가 만년을 보냈던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산책로. ⓒ이승원
나는 그 모든 텍스트들에 스민 타자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들면서 그 빛나는 공감의 에너지로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동네 악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연약한 소년 싱클레어가 자기 안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존재 데미안을 만나 마침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는 것처럼. 싱클레어의 영원한 멘토 데미안이 세상을 떠날 때 오히려 싱클레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생동감으로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의 육신이 세상에 없어도, 거울을 보고 데미안을 간절히 부르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바로 또 하나의 데미안임을 이제는 온몸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절실하게 말을 거는 ‘또 하나의 나’를 따스하게 끌어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존재로 힘차게 비상한다. 이것이 바로 에고(Ego: 사회적 자아)와 셀프(Self: 내면의 자기)가 하나 되는 순간, 개성화(individuation)의 순간이다. 에고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홍보하느라 너무 황폐해져버린 현대인은 바로 이렇게 또 하나의 셀프, 자기 안의 데미안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 안에서 치유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내적 자원을 창조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집필한 몬타뇰라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이승원
내가 삶이라는 기차를 잘못 탄 걸까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선택해서 탄 기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파스칼 메르시에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울리는 내면의 기적소리를 들어본다. 학생들에게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며 그야말로 ‘학교’와 ‘집’밖에는 오갈 줄 몰랐던 그레고리우스가 비 오는 날 강가에서 추락사할 뻔한 여인을 구해준다. 여인은 살아나자마자 마치 무엇에 단단히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남자의 이마에 알 수 없는 숫자를 기록한다. 이 기이한 인연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그는 급기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만다. 이 이야기가 ‘구해준 자’와 ‘구원받은 자’의 로맨스로 번지지 않고 포르투갈의 혁명가 프라두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또 하나의 모험이 된 것이 내게는 더욱 절묘하고도 기품있게 다가왔다. 주인공은 로맨스를 꿈꾸기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꾼 것이기에.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날 갑자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탄 것만 같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낀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주인공이 걷던 리스본의 거리 풍경. ⓒ이승원
이 문장은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내 영혼을 부서뜨렸다. 그런데 영혼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그 느낌이 참으로 시원했다. 그리고 내게는 이 문장이 던지는 화두가 ‘문학은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대답처럼 들린다. 우리 안에 1000개의 가능성이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그중에 10개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990가지의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십중팔구, 미처 세상의 빛을 못 본 채 안타깝게 사라져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1000개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버리며 살아간다. 문학은 바로 그 ‘나머지’의 소중함, 990개의 아름다운 꿈을 일깨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안타까이 사라져가는 그 모든 잠재적 가능성들이 곧 우리 자신임을, 문학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바로 문학이 아닐까.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있으면, 내 안에서 ‘이제 너는 다르게 살아도 돼’,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너무 매달리지마’라고 속삭이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기차를 타고 떠나는 충동적인 여행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스물아홉살 겨울, 그동안은 ‘여행은 사치’라는 생각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던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하고, 10년 후에 첫번째 여행기를 쓰게 되기까지,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나답지 않아도 좋은 시간들’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나답게 산다는 것이 곧 ‘남들이 살라는 대로’ 사는 것과 거의 동의어였던 시절. 타인이 ‘나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걸맞게 나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던 시절,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 ‘열정페이’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절, 인문대생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를 다 해도 ‘과연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시절. 문학의 동아줄이 나를 붙들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으로 잃어버린 가능성과 만나다
이렇게 나는 문학을 통해 내 안의 잃어버린 가능성과 만난다. 어쩌면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나 자신의 일부를 만나기도 하고, 100년을 살아도 분명 경험으로는 알아내지 못할 삶의 또 다른 진실을 섬광처럼 깨닫기도 한다. 나는 문학의 담장을 낮추고 싶다. 문학이 내게 주었던 크고 깊고 따스한 힘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피터팬>을 다시 읽을 때마다 ‘좀처럼 아이 같지 않았던 나의 과도하게 조숙한 어린 시절’을 아프게 기억하고,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처럼 철딱서니 없이 진정으로 ‘이제라도 뒤늦게 조금은 아이다울 수 있는 시간’을 되찾는다.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는 내가 한 번도 완전히 빠져본 적 없는 정열적 사랑, 꿈꾸기는 했지만 이룰 수는 없었던 광기 어린 사랑에 빠져본다. 닿을 수는 없지만 꿈에서라도 닿고 싶은 어떤 이상적인 감정, 감당할 수 없는 누군가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눈부신 꿈을 꿔본다.
이런 모든 다채로운 상상과 난데없는 감정이입이 ‘나만의 편협한 삶’에 갇혀 있는 나를 구원해 준다. 1인분의 삶에 갇힐 위험에 빠진 우리의 비좁은 삶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더 커다란 나, 더 깊고 복잡한 나, 마침내 ‘나’를 뛰어넘어 또 다른 타인들과 접속할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문학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문학의 담장이 낮아진 그곳에 아름다운 문학의 담벼락을 만들어, 누구나 함께 색칠하고, 덧칠하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문학이란 이름의 거대한 공동체적 벽화를 그리고 싶다. 문학이 아직 너무도 멀고, 거창하고, 심오하며, 다가가기 힘든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당신에게,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웃으며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