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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빈자와 부자, 기생충과 숙주 사이 / 조문영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6. 7. 05:33

[세상읽기] 빈자와 부자, 기생충과 숙주 사이 / 조문영

등록 :2019-06-05 16:34수정 :2019-06-06 12:51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이 칼럼에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미국을 들썩이게 한 거액의 기부 소식이 국내에 미담으로 전해졌다. 한 사립대 졸업 연사로 나선 로버트 스미스는 올해 이 학교 졸업생들의 학자금 빚을 모두 갚아주기로 약속했다. 소프트웨어 기업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사모펀드 회사의 설립자인 그가 학생들 대신 갚을 빚은 477억원에 이른다. 최근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와 이혼한 매켄지 베이조스도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눠야 할 과분한 돈이 나에게 있다”며 그가 약속한 기부액은 무려 21조원이 넘는다. 이들의 통 큰 기부는 부자의 품격이 논외로 밀려난 지 오래인 한국 사회에서 적잖은 반향을 내고 있다. 물론 금융자본주의와 플랫폼자본주의라는, 이 시대 고용 없는 성장을 주도하는 기업가들의 막대한 부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반문하고 싶은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이 미국발 소식을 접했을 때 오래전 책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들이 공짜로 주는데 우리가 달리 뭘 할 수 있나요?” 인류학자 다이나 라작은 이 말을 아프리카의 한 엔지오(NGO) 실무자로부터 들었다. 다국적기업의 시에스아르(CSR: 기업의 사회적 공헌) 활동을 대리하면서 이 실무자가 내비치는 무력감이란 선물의 강제성에서 비롯된다. 호혜적인 보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선물은 가난한 사람들을 채무자 위치에 종속시킨다. 시에스아르는 자신이 정한 돌봄의 규칙에 따라 빈자의 참여를 특정한 방식으로 독려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위계를 분명히 한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삶과 노동의 전 영역에서 단행해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 위계를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리 발악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때 공생의 바람은 무뎌지고 기생은 삶의 한 양식이 된다. 경제 시스템의 변동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손발이 묶인 사람들은 ‘도덕적’인 부자가 이따금 던지는 모이를 받아먹기 위해 주둥이를 힘껏 내민다. 영화 <거인>에서 자신을 미끼 삼아 교회의 후원을 따내려던 아버지에게 “왜 남들처럼 벌 생각을 안 하냐”며 역정을 내던 배우 최우식이 <기생충>에선 아버지의 기생 파트너이자 백수 가족의 기생 설계자로 열연했다. 전 가족의 기생 프로젝트가 처음 마주한 난관은 부자의 응징이 아니라 또 다른 기생‘충’과의 사투다. ‘급식충’과 ‘틀딱충’, ‘수시충’에서 ‘지균충’까지, ‘충’(蟲)이란 비속어는 관용의 ‘덕성’을 갖춘 상층의 인간들 대신 하층의 절박한 기식자들이 서로의 영토를 구획하기 위한 용도로 범람하지 않던가.

<기생충>에서 상층과 하층의 위태로운 공존을 위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냄새다. 기택(송강호)이 ‘선’을 넘지 말라는 박 사장(이선균)의 충고를 아무리 열심히 따르려 해도 파고드는 냄새는 어쩔 도리가 없다. 운전석에서 뒷좌석으로 스며드는 이 냄새를 기택의 딸 기정(박소담)은 “반지하 냄새”라 부르고, 반지하를 알 리 없는 박 사장은 “행주 삶는 냄새” “가끔 지하철 탈 때 맡는 냄새”라 묘사한다. 안절부절못하며 제 냄새를 킁킁대던 기택의 자기모멸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생충은 또 다른 기생충을, 숙주를 잡아먹더니 종국에는 자신이 기생할 또 다른 숙주를 발견한다.

‘케어’(The Care)라는 문구를 빳빳한 명함에 새기고 한판 사기극을 펼친 기택 가족의 도발은 애초에 결말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봄의 방식을 정할 권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빈자가 다른 빈자에게 ‘복숭아’를 먹이거나 최소한의 존엄마저 짓밟은 부자에게 칼끝을 겨누는 대신 또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게 가능할까? 로버트 스미스가 졸업 축사를 건넨 그 대학의 학생이 아님을 아쉬워하던 트위터 반응이 어쩌면 한 대답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기생하되 ‘선’을 넘지 않는 것, 때때로 ‘사람 냄새’ 풍기는 부자들의 선물에 감사하며 묵묵히 제 삶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결말을 단호히 거부한다. 부자-숙주가 되겠다는 기우(최우식)의 꿈은 양극화된 세계가 빚어낸 폭력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비극적 야심을 내비친다. 오랜만에 슬프고 강렬한 영화를 봤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6769.html?_fr=sr1#csidx52b3ed29070309aa00f75c02b41ea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