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헌
화가, 4·16재단 이사장
화가, 4·16재단 이사장
작년에 주격조 선생(주재환 작가의 ‘현실과 발언’ 시절 불리던 별명)과 내가 ‘보안여관’이라는 화랑에서 2인전을 연 바 있다. 이 전시회는 주격조라는 별칭에 맞추어 내가 김품격을 제안해 ‘주격조와 김품격의 2인전’이 됐다. 사실 ‘격조’니 ‘품격’이니 하는 말은 미술운동을 한 민중미술 패거리들이 낄낄거리며 희영수한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 전시회 이후 ‘품격’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예컨대 국가나 대통령, 남자나 여자만이 아니라 나의 말과 글, 그리고 그림의 품격을 스스로 검열하는 식의 버릇이 생겼다.
사실 품격은 먹고살기에 급급할 때는 거론조차 하기 힘들다. 지금 전쟁 통에 있는 중동국가들에서, 아니 나의 어린 시절 부산 피란살이에서 어떻게 품격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 들어 정치권을 보면 마치 전쟁 중에 있는 나라처럼 품격은 고사하고 살벌하기 이를 데 없다. 혐오의 폭언을 상대방을 향하여 포격하듯이 퍼붓는다. 이런 발언의 품위만 보면 틀림없이 우리는 전쟁 중이다. 분단 이후 오랫동안 냉전의 이념을 극대화해왔기 때문이리라.
원래 ‘품격’이란 말은 그야말로 말과 말하는 사람의 수준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제 나름의 품격이 있게 마련이다. 한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아울러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품격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품격은 한 사람의 인격이다.
예술, 특히 미술에서도 품격을 논할 때가 있다. 한 작품의 진정한 가치나 그 작품이 지니는 위엄이 있을 때를 말함이다. 그러면 한 작품의 가치나 위엄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정하는가? 당연히 관객과 더불어 그것을 만든 미술가 자신이다. 일차적으로 작가 자신이 작품에 품격을 부여한다. 그 뒤에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또 다른 팔자를 지닌다’. 즉 관객에 의해 그 품격이 결정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젊은 시절 귀족들이 드나드는 살롱을 찾아 헤맨다. 귀족들의 품격 있는 세계를 엿보기 위해서다. 그는 결국에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모여드는 살롱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고, 거기서 발을 끊고 소설 쓰기에 전념한다. 그 방법만이 자신을 구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쓴 작품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이 작품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민중미술가로 불리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80년대 초반 ‘현실과 발언’을 시작할 때 나는 ‘민중’이라는 낱말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낯선 용어였다. 당시 현발을 비롯한 여러 소집단의 미술은 그야말로 불온하고 불량한 미술이었다. 그러니 ‘격조’니 ‘품격’이라는 말은 우리의 ‘불량’과 ‘불온’을 숨기기 위한 위장전술이나 일종의 알레고리였을 것이다. 민중미술은 품격과 거리가 멀다. 저항미술이랄 수 있는 민중미술이 어떻게 ‘품격’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니 권력과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시대적 품격’임을 알게 되었다.
품격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돈과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품격은 바로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또 이 지식을 이용해 얻은 어떠한 지위도 품격을 갖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결국은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도 그 위치에 따른 자세와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품격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공감능력에서 배양된다. 이런 배려와 공감능력을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자연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인간세계에 대한 품격의 절대적 교훈이다. 요 근래에 시집을 낸 정희성 시인은 “자연을 표절”했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에 대한 미메시스(모방본능)적 공감능력은 예술의 본능적 태도다.
다들 아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온 뒤 막 갤 때 인왕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가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미술에서 겸재는 자연과의 실제적인 교감으로 제대로 ‘실경산수’의 품격을 갖출 수가 있었다. 그의 ‘진경산수’는 외형만을 담아내는 형사(形似)가 아니라 정신을 담아내는 전신(傳神)이었음을 후대 비평가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한 그는 평생을 같이한 친구인 시인 이병연의 병이 깊어지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아마 이런 절실함이 이 그림의 품격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나 예술에서 우리 시대의 품격은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서 나온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 속도만을 쫓아가거나 낮음을 추구하는 수평의 삶을 버리면 모든 것을 다 소유하려는 집착으로 귀결되고, 모든 것을 디지털과 알고리즘으로 해결하려는 편리함은 우리를 편협하고 왜소하게 만든다. 어린왕자는 네번째 별에서 끝없이 별을 세고 있는 한 상인을 만난다. 그는 센 만큼 그 별을 다 자기 소유라고 믿고 있다. 욕망(소유욕)은 인간을 품격 없는 이상한 사람들, 즉 바보로 만든다.
이런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서 ‘성공했으나 실패’한 대표적인 화가가 피카소다. 그의 천재성은 그가 그린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고립의 상태로 만든다.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의 저자인 평론가 존 버저는 말년의 피카소는 매너리즘의 극단에 매달려 자기의 천재성과 부에 속박되어 결국은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미술에서는 내용에 관계없이 형식과 재료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품격을 훼손시킨다. 형태나 색채, 때로는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스펙터클을 만들 수는 있으나 이런 작품은 대개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 없는 감탄사만 연발시킬 뿐이다. 이런 미술의 대표 사례가 ‘키치’(이발소 그림)다. 말이나 그림에서 과유불급이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품격은 빠름이 아니라 느림이다. 갯벌은 100년 동안 이어진 파도에 겨우 1m 늘어난다고 한다. 움직임이 잘 파악되지 않는 우주의 운행이 감성의 품격을 고양한다.
예술에서의 품격은 다른 세상에 대한 통찰이며 경청이다. 여기서 경청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지만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독서’(읽기)는 더 중요한 경청 방법의 하나다. 당연히 책 읽기(그림 읽기)는 품격과 함께 교양을 높인다.
독서로 세상을 넓히고 교양을 넓혀 품격을 스스로 쌓아갈 수도 있지만 예술가는 한편으로 예술가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과 작품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시장(자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 길만이 예술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예술에서의 정의로움은 그 자체로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