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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멸을 선험적으로 느끼는 게 시인의 감수성”[김혜순 시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6. 26. 16:17

“죽음과 소멸을 선험적으로 느끼는 게 시인의 감수성”

등록 :2019-06-25 15:32수정 :2019-06-25 19:53

 

세계적 권위 그리핀상 수상 김혜순

“시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시하다’”
“노벨문학상 얘긴 제발 하지 마세요!”


 
“한 해에 영어로 번역 출간되는 시집이 5, 6백권이라고 합니다. 그리핀시문학상 심사위원들이 그 시집을 다 읽어 본다고 해요. 이 상의 파이널리스트(최종 후보)에게는 모두 1만달러씩을 줍니다. 저는 그 1만달러를 받고 축제를 즐기려고 갔지 수상을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시상식이 열린 캐나다 토론토는 아시아인과 백인이 섞여 사는 도시인데, 시상식장이나 낭독회장에는 아시아인은 없었어요. 제 시집 번역자 최돈미씨와 저뿐이었지요. 그래서 제 이름이 불렸을 때 너무 놀랐고, 이건 현실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지난 6일(현지 시각) 시집 <죽음의 자서전> 영역본으로 캐나다의 세계적 문학상인 그리핀시문학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이 25일 낮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리핀시문학상은 시 부문 단일 문학상으로는 세계적 권위를 인정 받는 상으로, 해마다 캐나다 시인의 시집 한 편과 인터내셔널 부문 한 편씩을 시상한다. 2001년 첫해 인터내셔널 부문 상은 루마니아 태생으로 독일어로 시를 쓴 파울 첼란의 2000년도 영역 시집에 돌아갔으며, 그 뒤로 2013년 팔레스타인 시인 가산 자크탄에 이어 김혜순이 세 번째 수상자다. 고은 시인은 2008년 이 상의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죽음의 자서전>은 ‘하루’부터 ‘마흔아드레’까지 중음(中陰)을 가리키는 부제를 단 49개 시로 이루어진 연작 시집이다. 그리핀시문학상 심사위원회는 “2014년 세월호의 끔찍한 여파 속에서, 한국의 시인 김혜순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 이 재앙에 내몰린 아이들의 원혼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비극적인 작품을 써냈다”고 평가했다. 이 시집 영역본은 올해 펜아메리카문학상 번역시 부문과 미국 최우수번역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시인의 감수성이라는 것은 소멸과 죽음에 대한 선험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 책은 죽은 자의 죽음을 쓴 것이라기보다는 산 자로서의 죽음을 쓴 시집이에요. 죽음과 같은 순간에 처해졌을 때, 또는 제 주변 지인이나 사회적 죽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들을 쓴 것이죠. 제가 박사논문으로 김수영론을 썼는데, 김수영의 시 ‘눈’에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살아 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의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죠. 그 시의 의미를 늘 생각해 보곤 합니다.”

시인은 <죽음의 자서전>에 실린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29번째 작품인 ‘저녁메뉴’를 들었다. “‘엄마’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오래도록 투병하던 시인의 어머니는 지난주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투병에 관한 언급은 올 3월에 나온 그의 열세 번째 시집 <날개환상통>에도 나온다. 기왕의 시와 산문에서 ‘시하다’ ‘유령하다’ 같은 특유의 조어를 적극 활용했던 시인은 <날개환상통>에서도 ‘새하다’라는 새로운 수행성 조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여성 시인들의 시에서 또는 제 시에서 여성들은 두 가지 상반된 사물과 관념을 하나로 묶어 주는 큰 자아로 말하지 않고, 시 안에서 여성 스스로가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제가 ‘시하다’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큰 자아를 내세워서 관념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유사성의 원리보다는 스스로 시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되다’라는 은유에서 느껴지는 시선의 폭력적 힘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하다’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죠.”

1979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은 “언제나 당면한 오늘을 바라보고 당면한 한국 사회의 문제들 속에서 사유를 진행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다. 과거에 내가 쓴 시는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시아권 시인으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출판사가 작성한 보도자료와 관련한 질문에는 “노벨상 얘긴 제발 하지 마세요. 시인과 소설가더러 ‘너 이제 그만 써’라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작가는 누구나 괴로울 것 같아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다음달 초 티베트와 인도 여행 체험을 담은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펴내는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모르는 것이 자신이 아시아인이라는 것,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 자신이 결국엔 여성이라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티베트를 여행할 때면, 오래된 사원 벽화에서 설인 예티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신화 속 인물을 통해 티베트 사람들의 잠재의식을 읽어 보려 한 것”이라고 새 책을 소개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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