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권위 그리핀상 수상 김혜순
“시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시하다’”
“노벨문학상 얘긴 제발 하지 마세요!”
“시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시하다’”
“노벨문학상 얘긴 제발 하지 마세요!”
“한 해에 영어로 번역 출간되는 시집이 5, 6백권이라고 합니다. 그리핀시문학상 심사위원들이 그 시집을 다 읽어 본다고 해요. 이 상의 파이널리스트(최종 후보)에게는 모두 1만달러씩을 줍니다. 저는 그 1만달러를 받고 축제를 즐기려고 갔지 수상을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시상식이 열린 캐나다 토론토는 아시아인과 백인이 섞여 사는 도시인데, 시상식장이나 낭독회장에는 아시아인은 없었어요. 제 시집 번역자 최돈미씨와 저뿐이었지요. 그래서 제 이름이 불렸을 때 너무 놀랐고, 이건 현실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지난 6일(현지 시각) 시집 <죽음의 자서전> 영역본으로 캐나다의 세계적 문학상인 그리핀시문학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이 25일 낮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리핀시문학상은 시 부문 단일 문학상으로는 세계적 권위를 인정 받는 상으로, 해마다 캐나다 시인의 시집 한 편과 인터내셔널 부문 한 편씩을 시상한다. 2001년 첫해 인터내셔널 부문 상은 루마니아 태생으로 독일어로 시를 쓴 파울 첼란의 2000년도 영역 시집에 돌아갔으며, 그 뒤로 2013년 팔레스타인 시인 가산 자크탄에 이어 김혜순이 세 번째 수상자다. 고은 시인은 2008년 이 상의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죽음의 자서전>은 ‘하루’부터 ‘마흔아드레’까지 중음(中陰)을 가리키는 부제를 단 49개 시로 이루어진 연작 시집이다. 그리핀시문학상 심사위원회는 “2014년 세월호의 끔찍한 여파 속에서, 한국의 시인 김혜순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 이 재앙에 내몰린 아이들의 원혼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비극적인 작품을 써냈다”고 평가했다. 이 시집 영역본은 올해 펜아메리카문학상 번역시 부문과 미국 최우수번역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시인의 감수성이라는 것은 소멸과 죽음에 대한 선험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 책은 죽은 자의 죽음을 쓴 것이라기보다는 산 자로서의 죽음을 쓴 시집이에요. 죽음과 같은 순간에 처해졌을 때, 또는 제 주변 지인이나 사회적 죽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들을 쓴 것이죠. 제가 박사논문으로 김수영론을 썼는데, 김수영의 시 ‘눈’에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살아 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의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죠. 그 시의 의미를 늘 생각해 보곤 합니다.”
시인은 <죽음의 자서전>에 실린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29번째 작품인 ‘저녁메뉴’를 들었다. “‘엄마’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오래도록 투병하던 시인의 어머니는 지난주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투병에 관한 언급은 올 3월에 나온 그의 열세 번째 시집 <날개환상통>에도 나온다. 기왕의 시와 산문에서 ‘시하다’ ‘유령하다’ 같은 특유의 조어를 적극 활용했던 시인은 <날개환상통>에서도 ‘새하다’라는 새로운 수행성 조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여성 시인들의 시에서 또는 제 시에서 여성들은 두 가지 상반된 사물과 관념을 하나로 묶어 주는 큰 자아로 말하지 않고, 시 안에서 여성 스스로가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제가 ‘시하다’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큰 자아를 내세워서 관념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유사성의 원리보다는 스스로 시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되다’라는 은유에서 느껴지는 시선의 폭력적 힘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하다’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죠.”
1979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은 “언제나 당면한 오늘을 바라보고 당면한 한국 사회의 문제들 속에서 사유를 진행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다. 과거에 내가 쓴 시는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시아권 시인으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출판사가 작성한 보도자료와 관련한 질문에는 “노벨상 얘긴 제발 하지 마세요. 시인과 소설가더러 ‘너 이제 그만 써’라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작가는 누구나 괴로울 것 같아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다음달 초 티베트와 인도 여행 체험을 담은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펴내는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모르는 것이 자신이 아시아인이라는 것,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 자신이 결국엔 여성이라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티베트를 여행할 때면, 오래된 사원 벽화에서 설인 예티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신화 속 인물을 통해 티베트 사람들의 잠재의식을 읽어 보려 한 것”이라고 새 책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