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단 합법화 주역, 유럽의회 의장
‘아우슈비츠 생존자’ 시몬 베유 자서전
“동료들이 외치던 ‘두번 다시는’ 못 잊어”
‘아우슈비츠 생존자’ 시몬 베유 자서전
“동료들이 외치던 ‘두번 다시는’ 못 잊어”
나, 시몬 베유-여성, 유럽, 기억을 위한 삶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갈라파고스·1만6500원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럽의회 회의를 주재하는 시몬 베유. ⓒClaude Truong-Ngoc 갈라파고스 제공
어쩌면 탄탄대로의 출셋길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판사가 된 그는 두번이나 장관을 역임했다. 유럽의회 의원, 유럽의회 최초의 선출직 의장을 거쳤고 헌법평의회 위원으로도 일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최고등급인 ‘그랑크루아’(Grand Croix·대십자)를 비롯해 수많은 외국의 훈장을 받았으며 죽은 뒤엔 국민 청원으로 국가가 기리는 위인들만 머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경력만 보면, 부유한 귀족 혈통으로 잘 자란 남성 엘리트 지식인 관료의 생애 같지만 그가 홀로코스트 피해생존자이자 유대인 여성으로서 팔뚝에 형벌 같은 수인번호를 평생 새기고 시련과 울분을 견디며 투쟁했던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481명 남성의원 앞에서 홀로 여성의 현실과 임신중단 합법화를 역설하고, 강제수용소의 경험을 잊지 않으면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유럽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투신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는 ‘이례적 여성’이었다.
1979년 유럽의회 의장 취임 후. ⓒcommunautes Europeennes, 갈라파고스 제공
시몬 베유(1927~2017)는 휴양도시 니스에서 완전히 프랑스에 동화된 유대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7살이던 1944년 독일군의 ‘유대인 사냥’에 걸려든 그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용되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리투아니아로 보내진 직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르케나우 화장터에서 느꼈던 분위기, 풍기던 악취, 내가 보았던 연기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듬해 소련군이 진군해오자 음식도 빛도 없는 남녀가 섞인 수용소에서 그는 다시금 운명을 기다렸다. 당시의 참혹한 일상을, 그는 신도 몰랐으리라 단언한다. “단테가 말한 지옥이 여기 있었다.”
아이 때부터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사전을 뒤지던 베유의 롤모델은 어머니였다. 우파적 성향의 건축가 아버지와 달리 남편 몰래 좌파 잡지를 읽던 어머니는 강한 신념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용소에서 해방되기 불과 한달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곧잘 “자유와 독립에 대한 문제”를 말했다. 공부해서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말했던 것이다.
해방 뒤 유대인 생환자 여학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그는 남편과 격렬한 논쟁 끝에 직업을 얻는 데 합의했다. ‘아이 셋을 둔 기혼녀’라는 남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검찰청 보좌관에 수습으로 들어갔다.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고 격하시키는 모든 것에 극도로 민감했던 그는 서른 살에 교정행정국 법관이 되었고, 수형자들의 처지를 걱정해 “감옥 내 투사”를 자처했다. 하지만 “여자에 유대인”이란 이유로 자주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그의 삶에 변곡점이 된 건 1974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정권이 들어서면서였다. 새 정부가 ‘새로운 여성 정치인’을 찾으면서 영입한 그는 내각의 유일한 여성 장관이 되었다. 여성의 대표성을 갖고 지위를 얻었더라도 본인의 영달만을 꾀할 법도 하건만, 보건부 장관으로서 그는 임신중단을 합법화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종교계, 의료계, 유대인, 보수 가톨릭 여성 신도 등 반대파들의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편지를” 끊임없이 받았는데, 당시 그에게 쏟아진 혐오발언은 오늘날 심각한 ‘악플’ 못지 않다. 생존자에 대한 사람들의 무신경과 무감각은 그를 평생 분노하게 했다. 팔에 새겨진 수형번호를 가리키며 사물함 번호였냐고 묻던 사람, 임신중단 법제화를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했던 사람 모두 사회지도층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수용소의 기억과 가족을 잃은 순간의 충격적인 장면을 평생 트라우마로 갖게 된 그였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환대가 아니라 기상천외한 모욕을 받았던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는 매일 고통스러워 했을지언정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수치스러운 피해자이며 문신이 새겨진 짐승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기억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다른 이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2011년 유럽의회 브뤼셀 지부 시몬베유광장 개관식에서. ⓒEPP Group, 갈라파고스 제공
이 책이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이기도 할 텐데, 정치적으로 우파 계열이었던 그는 정치적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동지들’끼리만 연대하는 공산주의자, 상황을 단순화하는 인권운동가, 극우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어떤 경우에도 극우와 연합해서는 안 된다. 극우 지지자가 순교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무시해야만 한다.” 특히 ‘악의 평범성’을 말하는 한나 아렌트를 겨눠 “지식인 마초이스트”라고 규정하며 이례적으로 길게 비판한 점도 눈에 띈다. “누구에게나 죄가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베유가 왜 그토록 인류 모두가 죄인이라는 무책임한 진단과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다는 비관적 결말을 거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살아남아 기억을 전하고, 역사가 반드시 거듭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심으로 자기 초극의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시몬 베유와 남편 앙투안 베유의 사진이 걸린 팡테옹. ⓒJean-Pierre Dalbera, 갈라파고스 제공
말년의 그는 일방적인 듣기에 지쳤다며 자신의 말을 멈추지 않는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여성의 대의를 위해서 투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저 운에 맡겨져 있다는 점을, 아우슈비츠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생존자인 자신이 절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 인권 증진은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며 의인과 양심이 승리하리라 그는 굳게 믿었다.
베유가 한국 출판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형법 ‘낙태죄’ 조항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속화하면서다. 지난해 12월 그의 의회 연설문을 중심으로 한 책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갈라파고스)가 나온 뒤 지난 5월엔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꿈꾼문고 페미니즘 시리즈 2권)이 발간되었다. 이 책 <나, 시몬 베유>(Une Vie, 2007)는 그가 프랑스 지성의 전당에 해당하는 아카데미프랑세즈에 입성하도록 한 유명한 자서전이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을 쓴 이민경씨가 <국가가 아닌…>에 이어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