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우
영화칼럼니스트
영화칼럼니스트
1970년대 할리우드에선 재난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에어포트>(1970)가 성공한 뒤에 <포세이돈 어드벤처> <대지진>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이 나왔다. 재난영화의 관습은 홍수, 지진, 화산폭발,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인간의 실수로 인해 화학물질, 방사능 오염, 가스 누출, 화재가 발생하고 고립된 몇몇 사람이 안전한 곳을 찾아 탈출하고 재해 확산을 막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재난을 표현하기 위한 특수시각효과를 쓰기에 막대한 예산이 든다. 이런 재난영화가 등장한 미국의 1970년대는 그 전에 존 에프 케네디, 마틴 루서 킹 등 사회 유명인사의 암살,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 등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흔들리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영화 속의 재난은 이런 급격한 정치·사회 변화에서 오는 혼란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을 반영했다. 이런 경우 보통 책임감 있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중년 남성이 지도자나 전문가로 등장하고 남은 사람들은 이 가장의 지시에 따라 대피하거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으로 그려진다.
국내에서 재난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거대 예산 투입이 가능해진 2000년대 후반이다. <해운대>(2009)와 <타워>(2012) <연가시>(2012) <감기>(2013) 등이 비교적 흥행에 성공했다. <해운대>는 2004년 인도양 해양지진과 해일 같은 자연재해가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다는 가상의 상황을 다룬 영화였지만 나머지 재난영화들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 격차와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았다. <연가시>의 경우 국내에 진출한 초국적 제약회사가 구충제를 독점하기 위해 일부러 치명적인 기생충을 유원지에 푼다고 설정했고, <감기>는 불법 밀입국한 동남아시아 사람이 지닌 바이러스가 퍼져서 수도권 도시를 폐쇄한다는 설정이다. 여기서도 보통 아버지와 같은 중년 남성의 활약과 희생이 강조됐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후에는 <터널>(2016) <부산행>(2016) <판도라>(2016) 등이 나왔다. 이 영화들은 주로 재해를 당한 뒤 폐쇄된 공간에 갇힌 인물들의 공포감과 절망감을 강조하고 구조해야 할 주체인 국가의 무능함을 표현했다.
올여름에는 <엑시트>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느 뷔페식당에서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끝낸 가족이 거리에 가득 찬 유독가스 때문에 건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독가스가 점점 올라오자 가족은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려 하지만 옥상 문이 잠겨 있다. 아직 구직자이자, 대학교 때 인공 클라이밍을 했던 이 가족의 유일한 아들 용남이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 옥상 문을 연다. 가족들은 헬리콥터로 구조되지만 인원이 초과되자 용남과 용남의 대학 후배 의주는 옥상에 남는다. 이제 용남과 의주는 알아서 더 높은 다른 건물로 탈출해야 한다.
이전 재난영화들과 달리 국가가 구조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민간인의 자발적인 협조가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 화산 폭발 당시 전세기를 급파한 일, 강원도 고성 산불 발생 때에 효과적으로 대처한 사례가 있으니 국가의 무능은 어느 정도 개선된 것으로 그려졌다. 다만 백수이거나 기대만큼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한 남녀 주인공은 가족과 떨어져 격리되고 스스로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구직난과 각자도생이라는 요즘 청년들의 처지가 투영된 설정이다. 중년 이상의 가장들은 무력하고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영화의 절정에서 가족이 아닌 비슷한 처지의 개인끼리 돕는 사회적 연대가 표현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