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단상-하회마을 |
홍종찬 목사
지난주간 아름다운교회 전교인 수련회를 경상북도 문경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치르는 정례행사지만 이번에는 주변에 있는 안동 하회마을과 영주 소수서원을 탐방하는 특별한 수련회로 계획하고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아침 6시 교회에서 출발해서 여주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1호, 4호 차가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2호, 3호 차에 탑승한 인원만 잠시 들렸다가 안동 현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떠났습니다.
하회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그전에 다녀오셨던 나병은 장로님 인도 하에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 전통문화의 향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딜 보나 한국의 독창적인 가옥 구조와 정다운 골목길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빈 집들이 몇몇 있었지만 지금도 이웃 간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고 있는 씨족마을 공동체가 과거와 현재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회(河回)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이 동네를 휘감아 도는 게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확정했습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실사를 통해 “하회마을은 주택과 서원, 정자와 정사 등 전통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마을의 공간 배치가 조선시대 사회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듬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밝혔으며, 이들이 향유한 예술 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 공동체놀이, 세시풍속과 관·혼·상·제례 등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유네스코는 하회마을을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결의문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등재 이유를 밝혔습니다(인터넷에서). 하회마을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특히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일찍이 서원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前身)으로, 선조 5년(1572년), 류성룡 선생이 그의 나이 31세 때 후학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겨온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1607년 서애 선생이 타계하자 광해군 6년(1614년),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임금이 사원이나 서원에 내리던 편액(扁額)으로 노비와 토지 등을 국가에서 부담함)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얼마 후 1868년(고종5), 대원군은 “서원이 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좋은가, 서원이 없고 나라가 있는 것이 좋은가”라며 사액서원 47곳만 남기고, 충북 괴산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시작으로 전국에 있는 서원 1,000여 곳을 정리했는데, 그때에도 사액서원이라 훼철(毁撤)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만동묘를 맨 먼저 철폐한 것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만동묘는 임진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1703년에 건립되어 200여 년(1703~1908) 동안 극진히 제향(祭享)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패를 모시는 만동묘지기의 행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三相),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萬東廟)지기” 만동묘지기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보여주는 풍문입니다. 만동묘지기란 말 그대로 만동묘를 지키는 일개 경비원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위한 관둔전(官屯田)과 그에 따른 노비를 조정으로부터 제공받았고, 1844년(현종 10)에는 정식으로 관찰사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조선말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화양동 계곡에 있는 만동묘에 갔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흥선군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의 계단을 올라가자 만동묘지기가 달려와 흥선군을 발로 걷어차 계단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만동묘는 대명황제를 모신 곳이다. 지금의 임금이 행차하여도 부액(扶腋 곁부축)하지 못하거늘 누가 감히 황제폐하 앞에서 부액할 수 있는가”라고 호통쳤습니다. 큰 봉변을 당한 흥선군이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하인을 시켜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라는 사람에게 그 묘지기를 처벌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묘지기의 행위가 좀 과한 듯 하지만 이번 일은 당연한 처사라 죄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훗날 대원군이 된 이후 그는 만동묘부터 철폐시켰고 사제 변장의도 처형했습니다. 이미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청나라마저 국운이 다한 시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사대주의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류성룡의 형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붙여진 만송정(萬松亭) 소나무 숲과 그곳에서 건너다보는 부용대 역시 그 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꼭 지켜주세요)
창골산 원고보내주실곳 cgsbo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