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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잃은 소리꾼 가족의 귀향, 굴곡진 한 풀어내는 흥의 가락[57)서편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9. 5. 17:13

고향 잃은 소리꾼 가족의 귀향, 굴곡진 한 풀어내는 흥의 가락

등록 :2019-09-05 07:26수정 :2019-09-05 11:32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57)서편제
감독 임권택(1993년)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딸 송화(오정해)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다그친다.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딸 송화(오정해)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다그친다.

19921118일 오전 920, 전라남도 완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청산도. 41. 장면의 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멀리서 진도 아리랑을 주고받으며 송화와 유봉이 걸어온다. 동호도 흥이 나서 매고 있던 북을 친다정일성은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았다. 모두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세 배우,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을 바라보았다. 노래 부르고 장단 맞춰 춤을 추며 그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리 아리링,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번역할 수 없는 후렴구.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따라 부를 수 있는 흥. 이 장면은 세 번째 촬영에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상영시간 540. 한국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롱 테이크. 아마 그 말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의 하나, 라고 살짝 바꾸어도 괜찮을 것 같다.

임권택은 그때 <태백산맥>을 준비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하였다. 하지만 이미 꾸려진 팀을 데리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때 오래 전에 읽은 이청준의 단편이 떠올랐다. 떠돌이 소리꾼 가족의 이야기. 이미 아무도 판소리를 듣지 않는 세월이 되었는데도 유봉(김명곤)은 이 곳 저 곳을 떠돌며 소리를 팔아서 먹고 산다.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동호(김규철)는 그들 곁에서 도망간다. 하지만 누이가 그리운 동호는 세월이 지나 송화(오정해)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누이가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가 이야기의 시작이다.

동호(김규철)와 송화(오정해)는 유봉(김명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오누이처럼 자라나, 고수와 소리꾼으로 한 쌍을 이룬다.
동호(김규철)와 송화(오정해)는 유봉(김명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오누이처럼 자라나, 고수와 소리꾼으로 한 쌍을 이룬다.

임권택은 플래시백으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어떻게 전통이 부서져가고 향수만이 남는지를 비통하게 바라본다. 그때 삶의 한()은 노래 가락마다, 음율 마디마디, 소리 구석구석 스며들면서 흥이 되고 선율은 부서져가는 몸속으로 배어든다. <서편제>는 풍경의 영화이며, 소리의 이미지이고, 몸의 예술이며, 길과 시간의 거미줄이다. 그들은 실타래처럼 엉켰으며, 그걸 대가의 솜씨로 풀어나가는 임권택은 매 순간 거기서 고향에 관한 추억에 잠긴다. 그렇다. <서편제>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잃어버린 남도 예술가의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귀향길이다. 하지만, 하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도착할 때 그를 예술가로 만든 그 한의 정서가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떠나가는 누이를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다. 나는 거기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관객을 만나본 적이 없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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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908520.html?_fr=mt2#csidx87115c11d0c1afb99885bd6ade93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