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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 1:26-31)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귀하고 값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자식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내입니까? 자식이 귀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는 자식도 있고, 아내가 죽은 뒤 따라 죽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얼마만큼 값진 존재인지 시16:3절에서 하나님은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시시한 사람같이 보이는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존귀한 자들입니다. 값을 알고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다윗은 시139장에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윗은 시8편에서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렇게 고백하면서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 이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결국 우리는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천사가 우리를 섬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섬기는 천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죄인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가 할 수 없는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26절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하는 창조적 존재라는 신성한 창조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치관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요, 하나는 절대적 가치관입니다. 상대적 가치관을 비교 가치라고 말하고 절대적 가치를 창조적 가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각 창조했기 때문에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은 상대적 가치관 때문입니다. 사는 생활을 비교하고, 학위를 비교하고, 재능을 비교하고, 각각을 비교하다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열등 비화시키면서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나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 때문에 내 인생이 거기에서 비교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1:22절에 '모든 생물들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며 말씀하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바다에 충만 하라 땅에 번성하라' 그리고 2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또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8;6) 여기서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 이것은 천지 창조물입니다. 천지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지만물을 다스리면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했다' 다스리는 자는 주인입니다. /할/ 이 역사의 센터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면 역사가 바꾸어집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대통령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농부가 이 민족의 애국자입니다. 이 의식을 하나 가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청소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자리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할 때 세상이 내 집이 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있지만 주인처럼 일하면 그 사람이 사장이 됩니다. 노동자와 사장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할/ ▶셰익스피어가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모자를 벗고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는 음식점의 한 소년이 한숨을 쉬면서 '나는 언제 저런 사람이 되나'하고 한숨을 쉬자 그가 등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오, 소년 자네도 일할 때 내가 글을 쓰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그릇을 닦을 때 주인의 마음으로 닦게. 음식을 나를 때도 주인의 심정으로 배달해 보게 그러면 먼 훗날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네를 우러러 볼 것이네' /할/ 시8:6절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만물을 발아래 두었다.' 이 말은 '만물을 디디고 서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발로 디디고 서서 살게 했지 세상에 넘어지거나 세상을 부둥켜안고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만족하지 못합니까? 세상 모든 것을 품으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 것은 발로 디뎌야지 아무것도 가슴에 품을 것이 없습니다. 가슴에는 오직 하나님만 품어야 합니다. /아멘!/ '만물을 발로 디뎌라' 이것은 승리자의 고백입니다. 자기 존재가 창조적 존재요, 예수의 피 값을 지불한 거룩한 존재라고 느낀다면 그때부터 이 세상의 주인이요, 발로 디디고 서서 승리자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 옥영씨는 '세뇌된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동물과 다른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⑴죽음이 다릅니다. 동물은 얼마든지 죽여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면 큰 죄입니다. 살인은 가장 큰 죄입니다. ⑵가치가 다릅니다. 동물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양을 사러 가면 항상 앞에 가는 양은 비싸게 부르고 뒤에 쳐진 양은 싸게 부릅니다. 부지런한 양은 항상 앞장 서 가면서 풀을 잘 먹기에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가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고 팔 수 없습니다. 노예 매매 범이나 인신 매매 범은 큰 죄인입니다. ⑶실험의 대상이 아니다. 동물은 실험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부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를 무중력 상태에서 살 수 있는 지 죽는 지 인공위성에 넣어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실험용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생체 실험하던 일본군 741 부대가 할 빈에 있습니다. 영하 40도에서 발가벗겨 놓으면 얼마 만에 얼어 주나 실험도 하였습니다. 싸우나 실에서 땀을 계속 빼면 몇 분만에 죽는 가도 실험했습니다. 간악한 일본인들입니다. 이는 죄입니다. 동물을 실험할 수 있어도 사람은 실험할 수 없습니다. ⑷약육강식이 다릅니다. 동물을 지배하고 있는 엄연한 법칙이 있습니다. 약육강식입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연법칙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잡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의 먹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강한 사람을 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⑸윤리와 도덕이 다릅니다. 동물세계에는 윤리가 없습니다. 도덕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의 사슴 농장에 50마리 가량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숫 사슴 한 마리가 기운이 제일 쎄다고 암 사슴들을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숫 사슴이 접근하면 가서 피가 나도록 물어뜯는 것을 보았습니다. 돼지는 일부일처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윤리와 도덕을 벗어나면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이같이 사람과 동물은 5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 /할/ ◀제목 소개!▶
1. 하나님의 형상대로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26-27).
①'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과 성결을 부여하여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전체 세상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특 대우입니다. 인간을 영광의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아주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특 대우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따라서', 그 말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 아담과 늘 대화하시고 교제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쯤 되면 인간의 수준이나 값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을 그렇게 지으셨으면 하와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겠습니까? 아담의 갈비를 뽑아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했는데 아담이 깨어나 보니까 곁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여쭙기를 '이 여인을 내 아내로 주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내 아내를 이렇게 아름답게 지으셨어요'하고 묻자 하나님께서 '네가 바람피우지 말라고 예쁘게 지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 대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그런 값이 주어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흔히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몸으로 구성된 지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와 같은 육체적인 형질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엡4: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일그러져 타락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그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후5:17). 예수를 '믿음'이 곧 '의'요, 그의 '말씀을 따르고 지킴'이 '진리'요, '세속에서 항상 그 편에서 결단하여 서는 것'이 '거룩'입니다. /할/
②'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 '사람'이란 말은 '히'어 발음으로는 '아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아' 하신 것은, '사람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뜻은 '흙, 먼지, 티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아'라고 하신 것은, 마치 '흙아! 흙덩어리야! 이 먼지야! 티끌아!' 이런 말이 됩니다. 주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근본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아'하고 부를 때마다 '너는 근본적으로 비천한 흙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귀함을 받는 것은 우리 육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룩하다함은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믿/
③'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27) 여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 정, 의'로 지음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믿고 구속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3:10)라고 했습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구속함을 받아 처음 지음 받은 형상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으로 무한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만물의 영장으로, 양심도 주었고, 이성도, 자율성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성과 거룩 성을 주었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 성결하고자 하는 마음, 만물을 다스리는 주관성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영장(靈長)이라는 것은 최고의 힘을 가진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할/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마치 옛날 대영제국의 왕이 자기가 가지 못하는 지방에 자기 형상을 만들어 세워 그 위엄과 통치권을 표시한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당신의 주권을 유지하시며 진행하시기 위하여 대리로 쓰시려고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만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
④창조의 특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 빌4: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무안한 가능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믿/ ▶내의명주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인도에 어떤 장자가 귀여운 자기 아들 옷 속에 값진 보배 구슬을 매달아 주었으나, 그 아이는 집을 뛰쳐나와 거지가 되어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그 구슬이 자기 옷 안에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몇 해가 지나서야 자기 집을 찾아오게 된 그 아들에게 '어째서 너는 네 옷 속에 값진 보배 구슬이 있는데도 거지 노릇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때서야 그 거지 아들은 '자기 옷섶에서 구슬을 이제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답니다. 실로 누구에게나 다 내의 명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무한한 가능성을 깊이 묻어두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영성이 깨어납니다. /아멘!/ ▶인도의 수녀 테레사는 알바니아의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몸집도 작았습니다. 인물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처럼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 스스로를 가리켜서 즐겨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연설 가운데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테레사가 인도의 빈민촌에 뛰어 들었습니다. 사랑을 품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버려진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랑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빈민굴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1997년 그가 죽었을 때, 인도에서 국장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그의 장례식이 방영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했던 그의 삶이 놀랍도록 성장해서 큰 나무처럼 된 것입니다. ⑵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가치 성'을 주셨습니다. 막8:36-37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너희는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8절에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엄청난 가치 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아멘!/ ⑶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독특한 '유일성'을 주셨습니다. 70억이 넘는 인간사에 나를 닮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데일 카네기'는 '당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특성은 무엇인가? ㈀유일성입니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70억 가운데 우리 모두 하나 하나를 지어주셨습니다. 똑 같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공주병, 왕자 병이 여기서 나옵니다. ㈁영원성입니다. 영원히 삽니다(본질). 그래서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지, 정, 의'의 인격체입니다. 인간을 기계로 짓지 아니하시고 한 개인의 인격체로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인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거룩성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양심에 가책이 옵니다. ㈄사랑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입어야 하고 주어야 합니다. /아멘!/
⑤그럼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가? 그 이유는 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창2: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남녀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더 짙은 것은 여자를 남자 갈비뼈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성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고로 좋은 반려자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바가지들을 긁지 마십시오, 또 여성은 남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원리입니다. /아멘!/
⑥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입니까? ⑴하나님은 당신을 예배 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전3: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신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종교의 씨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주님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14:6). 이렇게 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 앞에 나아가서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3)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복은 엿새에 수고하는데 있지 않고 일곱째 날에 안식(예배드리는 날)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가? 요4: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3절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⑵하나님은 당신을 사회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상에 최초로 세운 기관이 가정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주례로 가정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정은 계약에 근거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가정을 지탱하는 힘은 건강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권세도 아닙니다. 가정에 사랑이 식어지면 순식간에 파괴되고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하와를 지을 때에 아담의 머리뼈로 짓지 않음은 하와로 하여금 교만하지 못하게 함이요, 발가락의 뼈로 짓지 않음은 아담으로 하여금 무시를 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지었는가? '가슴에 품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1:18)고 했습니다. 인간은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의 약점과 부족하고 모자라는 점이 무엇인가를 보고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⑶하나님은 당신을 문화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문화적인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비록 소보다 힘이 새지 못하나 이성으로 트랙터나 콤바인을 만들어 이용하면 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다의 고기보다 헤엄을 잘 치지 못하나 군함이나 잠수함을 만들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독수리처럼 나르는 날개가 없으나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만들어서 그보다 더 높은 창공을 나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성적 지각을 선용하면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를 대적하는 반문화주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며, 그렇다고 세속문화에 동화되어 세속적인 유행에 빠져 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인류의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문화를 개혁하고 변혁하는 자라야 합니다. /할/ ⑷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기 위하여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창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이 말은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친구처럼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도 동행하셔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너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이 세상을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며 사귀고 하나님과 대화(교제)하기 위합니다. /믿/아멘!/
2. 인간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28-31)
①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인간들을 지으셨습니다. /믿/ 성경은 온통 축복 받은 비결로 가득합니다. 32,500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려 7,000번 이상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중에 가장 큰복은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아멘/ ②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라 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살인자 가인을 낳았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습니다.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번성한 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죄악뿐이었습니다. '충만해라'고 하셨는데 죄악만 충만했고, 파괴와 강포만 충만해졌습니다. 시기, 질투, 원망, 불평, 불만, 또 살인, 음란, 도둑질, 불의, 추악, 비방, 탐욕, 교만, 불효, 무자비한 것들이 충만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써 그 생명을 보존하고 번성케 하여 '이 땅에 가득 하라'는 축복입니다. /할/ ▶여기 '충만'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서 자주 빛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채우다. 성취하다. 완성하다'라는 뜻입니다. 또 '넘치다. 차고 넘치다' 등의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⑴만선, ⑵도시에 꽉 차있는 인구, ⑶일정한 수의 전부(만수), ⑷일정한 기간의 전부(시간의 충만), ⑸어떤 일의 완성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신약의 경우 막6:42-43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는 경우입니다. 바구니가 꽉 찼음을 가리킵니다. 또 시24:1절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의 은총입니까? /할/ ③'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고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유산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유산을 잘 관리하면 복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잘못 관리하면 대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것처럼 인간은 이 세상을 잘못 관리하고 잘못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대 재앙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우선 그 좋던 관계들이 악화되어 서로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다 이웃사람들입니다. 성폭행 자들을 잡고 보면 다 이웃 사람들입니다. 원수가 집안에 있습니다. 또 지금 지구가 심각하게 열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는 연간 표면온도를 14도로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야 인류가 농사를 짓고 동식물들이 자라고 물고기가 생존할 수 있는데 그동안 사람들이 이 지구를 혹사시켜 열을 받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각종 폐기물들을 아무데나 버리고 무분별하게 파헤치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내뿜고 가는 곳마다 석유를 뿌리고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100년 전부터 비행기를 만들어 자동차 보다 몇 백 배나 더 되는 화석연료를 하늘에 뿌리고 다니니까 21세기 말에는 온도가 5.2도가 높아져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춥게 되어 이상기온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없었던 이런 이상기온이 왜 요즘 자주 발생하는가 하면 모두 이 세상을 잘못 관리하여 지구가 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구뿐 아니고 땅속도 열을 받았습니다. 자식이 이사를 가면 부모님이 빈 냉장고를 가득 채워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주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공중에는 맑은 공기로 충만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공기 속에는 각종 에너지들과 영양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땅속에는 물을 충만하게 채워 놓으시고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충분하게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무엇을 심든지 충만하게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또 이 세상에 사람들로 충만하게 하시고 계속해서 낳고 또 낳아서 이 세상은 사람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이 충만함을 다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열 받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선한 뜻을 다 거스르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맑고 신선하던 공기를 오염시켜서 공기를 마시면 온갖 질병이 유발되어 120년을 살아가던 생명들이 단축되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 맑고 시원하든 물을 오염시켜서 이제는 물이 독을 품고 있어 마실 수가 없게 되어 기름보다 더 비싼 값으로 물도 사서 먹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도 오염되어 각종 먹을거리들이 오염되어 8-90세를 살아가는 것도 각종 암과 질병에 노출되어 평안하게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 오늘 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믿/ ④'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후 저주를 받음으로 인간이 평생토록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살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린다는 것은 수고와 노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건만 오늘날 도리어 인간들이 피조물들에게 다스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오면 또 선거 철이 오면, 또 새 집을 짓고 빌딩을 지으면 죽은 돼지 머리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복을 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십시오!' 모든 피조물들이 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타나는데 유독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지 못하고 더 반항하고 멀리 떠나는 모습뿐만 아니라 우상에게, 무당에게 머리 숙여 복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할/ ⑤하나님의 뜻대로 약속하신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빼앗긴 축복을 되찾으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요3서 2절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마치 기관차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 객차나 화물차가 잘 움직이지만 기관차에 고장이 생기면 객차나 화물차를 끌고 갈 수 없는 이치입니다. 본래 영의 기능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이루는 것인데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가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건너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전12:13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할/ ⑥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는 '보라 얼마나 좋으냐? 보라. 얼마나 아름다우냐?'라는 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보고 계십니다. 4절에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빛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 동안은 죄악 가운데서, 어두움 가운데서 두려워하며 절망적인 생활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빛이 내게 임해서 밝은 생활을 하며 사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할/ 사람들이 교회에 봉사할 때 누가 좀 보았으면, 목사님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에 섭섭함이 생겨서 낙심하고 물러서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들이 몰라주고, 목사가 보지 못하여도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행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열여섯 살 된 '나르시스'라는 소년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그 소년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사랑을 고백하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만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이란 단어가 유래됐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느 여고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하면서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즉 '자애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한 여학생이 '선생님 제가 아무래도 그 병에 걸린 것 같아요.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거울 앞을 떠날 수가 없거든요' 그러자 선생님이 '얘야 그것은 '자애 병'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병이란다.' /할/ 사람이 거울을 보는 이유는 자신을 보는 즐거움과 만족감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어떤가?'하는 것은 우리를 적절하게 긴장시키기도 하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 외에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뒤에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느낀 소감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⑦그러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생!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조지 트루엣'이란 사람은 '최고의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최고의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온 세계 속에 들어있고 우리 인생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있을 만큼 우리가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할/ ⑵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이 '가라사대'하시니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천지를 창조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 자체에 인생 전체가 들어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기기도, 없어지기도, 세우기도,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조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만큼 중요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설계대로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히11: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처럼 천지만물이든 인생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⑶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금 역할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의 열매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벽은 무너지고 생육, 번성, 충만, 지배, 다스리는 복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는 인정하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심히 좋았더라'는 칭찬 받을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11년 8월 2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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