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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격변하는 환경에서 안 바뀔 단 하나 / 김은형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9. 23. 17:42

[편집국에서] 격변하는 환경에서 안 바뀔 단 하나 / 김은형

등록 :2019-09-22 18:35수정 :2019-09-23 09:47


 

김은형
문화에디터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추석 극장가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작심한 대작 한국영화들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올해는 전반적으로 제작비 규모가 줄었지만 흥행에 성공한 건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정도다. 그것도 손익분기점 260만명에서 100만명 정도를 넘겼으니(92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자료) 큰 성공이라고 보긴 힘들다.

< 신과 함께> 시리즈 이후 주요 상업영화, 특히 대작들이 흥행에 맥을 못 추면서 한국영화 위기론도 나오고 있다. 위기론의 분석 가운데 앞에 등장하는 게 대형 투자배급사들의 과도한 권력과 안일한 결정이다. 돈줄을 틀어쥔 투자사들이 제작에 개입해 상업영화 안에서 참신하고 도전적인 기획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검증된 감독, 배우와 안전한 작품을 선택하다 보니 창작의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는 형국이다. 실제로 1990년대 한국영화 시장의 도약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던 스타 제작자들의 이름이 새롭게 등장하지 않고 작품성과 흥행력을 함께 지고 가던 패기 넘치는 신진 감독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침체 위기의 영화판과 달리 온라인 기반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오티티(OTT: Over The Top) 서비스 시장은 끓기 시작한 용광로처럼 뜨겁게 움직이고 있다. 전세계 오티티 시장을 선도하는 넷플릭스의 확장세와 출격을 준비하는 디즈니, 애플티브이, 아마존프라임 등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한국 서비스 기업들도 팔 걷고 나섰다. 지상파 3사가 운영해온 과 에스케이텔레콤의 옥수수를 통합한 웨이브를 시작했고 자체 콘텐츠로 티빙을 운영하던 씨제이이엔엠과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도 손을 잡았다.

대기업 통신사의 막강한 자본력으로 먼저 치고 나온 웨이브2023년까지 3천억원 규모의 콘텐츠 투자를 한다고 한다. 이 돈으로 지상파 3사 대작 드라마를 만들고 오티티 서비스에 독점 콘텐츠를 확보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2000년대 중반 양대 통신사가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어 판을 흔들던 때가 생각났다. 2005년 에스케이텔레콤은 당시 가장 중요한 제작사 중 하나였던 아이에이치큐를 인수한 데 이어 이듬해 영화 <괴물>로 돌풍을 일으킨 영화사 청어람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었다. 케이티는 당시 영화 제작 물량이 가장 많던 싸이더스를 경쟁적으로 인수했다. 디엠비(DMB), 와이브로, 아이피티브이(IPTV) 등 급변하는 영상 서비스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1, 2위의 대어들을 인수해 독점적인 콘텐츠 확보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찻잔 속의 태풍. 콘텐츠 시장은 자본력만으로 움켜쥘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똑같은 실패는 대기업 삼성과 대우가 비디오 플레이어 생산을 하면서 타이틀 확보를 위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철수했던 1990년대에도 있었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얄미울 정도로 영리하다. <킹덤>처럼 로컬 제작에서 최고의 상업 작가와 스태프를 불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애덤 샌들러처럼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서는 인기가 떨어진 배우들을 소환해, 극장 가서 1만원을 주고 보기는 아깝지만 집에서는 기꺼이 2시간을 즐길 만한 영화들을 만든다. 또 한국의 첫 투자작이 봉준호 감독의 <옥자>였으며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로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가장 중요한 예술영화 감독들도 놓치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넷플릭스는 제작자들에게 결정권을 기꺼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최고 콘텐츠 책임자가 반대하는 제작도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한다. 파괴적 혁신의 주인공이라는 무자비한 별명을 지닌 투자자이지만 자신의 눈치와 압력에서 자유로운 제작자들의 손에서 성공하는 작품이 나온다는 믿음만은 굳게 고수하는 것이다.

이미 한번의 실패를 겪은 에스케이가, 몸집 무겁고 결정은 더딘 지상파 방송과 머리를 맞대고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시장이 격변하고 엔터테인먼트 생태계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진리는 콘텐츠의 힘이다. 이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는 합종연횡은 다시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공산이 크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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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0454.html?_fr=mt0#csidxc8e065d0e3befd6840ffef85dabba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