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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그들이 품고 온 세계 / 조문영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9. 27. 11:36

[세상읽기] 그들이 품고 온 세계 / 조문영

등록 :2019-09-25 17:06수정 :2019-09-26 11:48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박사과정을 시작한다고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영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험용 영어만 간신히 익힌 상태에서 수업에 들어가니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탁구공을 받아치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도저히 낄 재간이 없어 글이라도 잘 써보자 다짐했지만, 두어 시간이 지나도록 한 단락을 벗어나질 못했다.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유난히 파란데 정작 내 마음은 하수구에 끼인 물티슈처럼 너덜너덜했다.

그즈음 셸리가 면담을 제안했다. 학과 행사 때 인사를 나눴던 행정직원이었다. How are you?(하우 아 유)Im fine, thank you(아임 파인, 생큐)라 답하는 의례적 대화처럼, 학교생활이 어떤지 묻는 그녀한테 글 쓰는 게 힘들다고 몇 마디 덧붙인 게 다였다. 사무실에 들렀을 때 셸리는 한 수업의 강의계획서를 내밀었다. 전담 강사가 대학원생에게 매주 일대일로 글쓰기 지도를 해주는 수업이란다. 공대에서 개설된 수업인데 담당자에게 직접 문의해 보니 다른 단과대학의 학생도 신청할 수 있단다. 수업 관련 비평문이나 학기말 리포트를 미리 작성해 교열 서비스를 받으면 좋겠단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당황한 나는 생큐만 연발했다. 코디네이터로 불렸던 이 행정직원을 십오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나의 감사를 정중히 사양했기 때문이다. 네가 감사할 일이 아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한국에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면서 이곳을 풍요롭게 만드는 네 기여를 생각했을 때 학과에서 이 정도의 수고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당시 다른 학과에서는 중국 유학생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백인 교수한테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 경험을 미국 대학의 품격을 증명하는 일례로 활용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당연한 의무는 내게 선물로 남아 모종의 부채감을 안긴다. 2019년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16만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품고 온 16만개의 세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학과에 입학하는 외국인 학생 수는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나 역시 바쁘다는 핑계로 선물을 제대로 되갚아 본 적이 없다. 대학이 재정난을 이유로 직원 고용을 포기하고 대학원생들에게 변변찮은 장학금을 주는 식으로 학과 행정을 땜질하다 보니 미국에서의 추억을 소환하는 게 멋쩍기까지 하다. 무임승차에 예민한 학생들은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유학생과 함께 조별 과제를 맡는 불운이 생길까 신경을 곧추세운다. 수학 능력이 부족한 외국인 학생들이 수업 분위기를 저해한다며 교수들도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다. 중동에서 온 무슬림 학생부터 일본에서 온 성소수자 학생까지 16만의 세계는 한국 대학에 다양성의 축복을 선물했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서로가 제 정답만 강요하며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그들이 품고 온 세계에 호기심은커녕 무관심과 냉대, 심지어 조롱을 일삼는 경우를 최근의 뉴스에서 심심찮게 본다.

외국인 유학생이 급증한 배경에 대학 재정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학령인구 감소, 등록금 동결 등 난제가 겹치다 보니 중국인 유학생의 규모에 따라 대학의 적자 폭이 결정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학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새롭게 제도를 정비하고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지만 잘못 엮인 첫 매듭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이번 학기에 중국에 관한 수업을 열었더니 다양한 세계를 품은 학생들이 왔다. 제 나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중국 대륙의 학생, 송환법 시위 이후 친중·반중 대립이 격해져 본국에서 중국 공부하기가 버겁다는 홍콩 학생, 중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귀환한 한국 학생, 전통을 강조하는 부모 세대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는 중국계 미국 학생, -중 관계 너머의 중국을 보고 싶다는 다른 학생들까지, 각자의 세계에서 직조한 중국을 대화의 장으로 가져왔다. 지식과 정보가 도처에 범람하는 시대에 교수의 역할이란 제 부분적 앎을 강요하기보다 각자가 품고 온 세계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것, 동시에 그 세계를 낯설게 탐문하도록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 이 마주침을 거쳐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질문은 다시 내게로 온다. 나 역시 이 마주침의 여정에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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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0897.html#csidx58e4bd3fad4ea0c989a7a526f36c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