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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재수에 관한 기억 / 김수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2. 2. 04:58

[편집국에서] 유재수에 관한 기억 / 김수헌

등록 :2019-12-01 18:22수정 :2019-12-02 02:34


 

김수헌 ㅣ 경제팀장

지난주 뇌물 혐의로 구속된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을 13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과천에 있던 재정경제부를 출입할 때였다. 청와대에서 돌아와 고속 승진해 재경부 주요 보직인 은행제도과장을 맡고 있던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그 자리에서 오간 얘기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내시였잖아. 청와대 파견 공무원 중에 이런 케이스는 내가 유일했지.청와대 제1부속실 소속으로 노 대통령 수행비서를 한 특이한 이력을 농담 섞어가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장면이다. 공무원답지 않게 튀는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청와대 근무 중 우연한 기회에 노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윗사람을 매료시키는 능력은 관가에 여러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탁월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엘리트 관료에다 경제학 박사인 그를 지근거리에 두고 경제 현안 등에 대해 자주 조언을 구했고, 여러 회의에 임의로 배석시켜 의견을 내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정치권의 한 친노 인사는 허심탄회하게 묻고 토론할 수 있는 똘똘한 정책 참모를 곁에 두고 싶어했던 노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늘공(직업공무원)한테 수행비서를 시켰다고 했다.

유 전 부시장은 수행비서가 되기 전인 2004년 초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이때 민정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같이 일을 한 기간은 짧았지만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의 형 건평씨의 처남 민경찬씨의 653억원 불법 펀드 모금 의혹 사건이 불거져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문재인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비서관이 청문회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유 행정관이 총대를 멨다. 그는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듣고 싶어한 내용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민정수석에서 물러났지만, 몇달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2017년 정권이 바뀌자 이런 히스토리를 아는 이들 사이에선 유재수가 금융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실제 그는 정부 출범 직후 금융관료의 꽃이라 불리는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에 임명됐다. 유 전 부시장이 금융위 안에서 금정국장으로 가는 통상적인 보직 코스를 밟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소 의외의 인사라는 평도 나왔던 만큼, 정권 교체의 덕을 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가 잘했더라면 좋은 사례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제·금융 쪽 맨파워가 부족한 진보정권으로선 보수적인 관료조직 안에 자기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구현하는 데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권 핵심들과의 친소관계는 가치 추구대신 노골적 사익 추구로 이어졌고, 그의 금정국장 임명은 최악의 인사 사례로 남게 됐다.

이 사건 수사가 본격화한 이후 검찰발로 여러 얘기가 흘러나온다. 정권 초기 금융권 인사를 유 전 부시장이 좌지우지했고,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인사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는 설도 들린다. 돌이켜 보면 정권 교체 직후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주요한 자리 인사를 놓고 석연치 않은 소문이 나돌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정권의 도덕성에 큰 상처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리 혐의를 받는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청와대 감찰이 돌연 중단됐고, 당사자는 징계 없이 조용히 명예퇴직을 했다. 곧바로 차관보급인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 자리를 얻고, 석달 뒤엔 다시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시 경제부시장으로 영전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권력의 뒷배가 작용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스토리다.

최근 <한겨레> 보도를 보면, 검찰이 조국 전 민정수석이 주변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고 한 뒤 감찰 중단을 지시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박형철 청와대 민정수석실 반부패비서관으로부터 확보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사태는 심각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이 외압에 못 견뎌 직무를 유기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막지 못한 것이니, 대통령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본다. 문 대통령이 신속히 사실관계를 파악해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minerv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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