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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무단촬영 사진 첨부한 판결문과 재판권 / 류영재 춘천지방법원 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2. 2. 17:40

[세상읽기] 무단촬영 사진 첨부한 판결문과 재판권 / 류영재

등록 :2019-12-01 18:22수정 :2019-12-02 12:35

 

류영재 ㅣ 춘천지방법원 판사

지난 한달, 판사 사회가 술렁였다. 발단은 소위 레깅스 판결문에 첨부된 무단촬영 사진이었다. 누군가가 레깅스를 입은 한 여성의 뒷모습을 수초간 무단촬영했다. 그 사람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무단촬영 동영상 사진을 실었다. 무단촬영 사진이 첨부된 판결문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몇몇 판사들은 화장실 용변 무단촬영, 속옷 또는 신체 부위 무단촬영 사진을 판결문 범죄일람표에 첨부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피해자 쪽과 시민사회는 판결문에 무단촬영 사진을 첨부한 행위가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2차 가해라며 비판했다. 대검찰청은 공소장에 무단촬영 사진을 첨부하지 말라는 지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판사들은 대논쟁을 벌였다.

판결문 무단촬영 사진 첨부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소개한다. 성폭력처벌법상 불법촬영 범죄로 기소되었다는 것은 형사고소인이 무단촬영 자체를 문제로 생각하고 그 사진이 타인에게 소지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의미인데, 그런 재판의 판결문에 문제 된 사진을 실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무단촬영 사진을 볼 수 있게끔 하는 것은 형사고소 취지에 반한다. 성폭력처벌법에 의하면 법원은 재판을 할 때 성폭력 피해자의 인격권을 보장하고 2차 가해를 방지할 책무를 지는데, 판결문에 무단촬영 사진을 싣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인격권 침해 또는 2차 가해에 해당한다. 판결문 작성에 있어 피해자의 인격권이 침해되는 것을 감수하여야 할 정도로 무단촬영 사진 첨부가 필수불가결하지 않다. ④2차 가해 확산 방지를 위하여 판결문의 검색·열람·등사 과정에서 사진을 가리는 등의 사후구제조치가 필요하다.

한편으로,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다. 재판은 불쾌한 사실도 기록하여야 하므로 무단촬영 사진을 판결문에 싣는 것도 사실기록의 한 형태로서 허용되어야 한다. 판결문에는 재판 당사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의 개인정보가 기재되는데 동일한 개인정보인 무단촬영 사진 첨부만 금지될 이유가 없다. 판결문 작성 방식을 포함한 재판의 전 과정은 판사의 재량에 따라 독립적으로 진행돼야 하므로 판결문 작성 방식 중 무단촬영 사진 첨부를 금지하는 것은 재판독립을 침해한다. 판결문의 적절성 여부는 그 판결문을 작성한 재판부만이 판단할 수 있고 다른 판사나 사법행정권자가 관여하는 것은 재판독립 침해 내지 사법농단에 해당한다. 만일 무단촬영 사진 첨부가 부적절하더라도 판결문 작성 재량을 제한해선 안 되고 판결문의 법원 외부 공개만 제한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성폭력처벌법상 불법촬영 재판의 판결문에 무단촬영 사진을 첨부하는 관행이 일부에서라도 형성될 경우, 무단촬영 피해 고소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이 맘에 걸린다. 수사 및 재판 자체도 힘든데, 자신의 무단촬영 사진이 판결문에 실려 최소 15천명의 판사 및 법원 직원들에게 공개될 수 있다는 위험을 추가로 감수해야 한다. 무단촬영 피해를 고소했더니 오히려 해당 사진이 판결문에 실려 영구히 남는다. 아이러니하다.

잠잠하던 판사 사회를 불붙인 논쟁을 지켜보면서 문득 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판사들은 뭘 위해 논쟁을 하는 것일까.사실 이 사안은 단순하다. 판결문에 무단촬영 사진을 첨부하는 것이 피해자 인격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면 이를 최소화하고 앞으로 관련 사진을 첨부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에도 그와 달리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재판독립 침해, 사법농단이라는 말이 나온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이리 치열한가. 판결문에 무단촬영 사진을 첨부할 재판권을 지키기 위해서인 걸까, 아니면 상급심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잘못을 지적당하지 아니할 판사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인 걸까.

불법촬영으로 기소된 재판 판결문에 불법촬영물을 싣는 것이 적절한가에서 시작한 질문이 재판독립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피해자 인권을 보장하라는 법원 외부의 요구는 재판에 대한 공격으로, 법원 내부의 자성은 동료 판사에 대한 테러로 표현된다. 국민뿐만 아니라 동료 판사까지 신경써야 하다니 무서워서 재판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한숨이 나온다고 한다. 재판독립이란 그런 것인가. 국민이든 동료 판사든 그들로부터 나온 재판에 대한 지적을 신경쓰지 않고 아무것도 삼가지 않는 상태에서 편히 하는 재판, 그것이 재판독립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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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9172.html#csidx07723ba271e5e36bf6b3e74a8a47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