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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아카데미, ‘백인들만의 리그’ 넘어 변화·다양성 담은 ‘열린 무대’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11. 03:53

2020 아카데미, ‘백인들만의 리그’ 넘어 변화·다양성 담은 ‘열린 무대’

등록 :2020-02-10 20:12수정 :2020-02-11 02:40

 

내부에서 쇄신 목소리 나오고
아시아·제3세계 작품 주목하자는
시대적 흐름 본격적으로 나타나

흑인여성·소수자인 가수
시상식서 오프닝 공연 눈길
주제가상 후보 ‘겨울왕국’ OST도
10개국 엘사들 자국 언어로 불러

일부선 “아직 부족” 비판
연기상 후보 중 유색인종 1명뿐
감독상 후보 여성 한명도 없어


현지시각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키워드는 ‘변화’와 ‘다양성’이었다. 이날 시상식은 흑인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꼽히는 배우 겸 가수 저넬 모네이의 공연으로 시작해 그 의미를 더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현지시각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키워드는 ‘변화’와 ‘다양성’이었다. 이날 시상식은 흑인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꼽히는 배우 겸 가수 저넬 모네이의 공연으로 시작해 그 의미를 더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쓸면서 아카데미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다양해졌다.’(영국 <비비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핵심 키워드는 ‘변화’와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 영화계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 그것도 한국의 <기생충>이 국제영화상은 물론 아카데미 주요 부문 5개 중 3개(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뉴욕 타임스> 등 전세계 주요 매체와 통신은 <기생충>의 이번 수상을 “오스카를 넘어 전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다”고 대서특필했다.

<기생충>의 4개 부문 수상 외에 <1917>의 촬영상·시각효과상·음향믹싱상 등 3개 부문 수상이나 <조커>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 <주디> 러네이 젤위거의 여우주연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브래드 핏의 남우조연상, <조조 래빗>의 각색상 등 다른 부문의 수상작·수상자들은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기생충>이 “반전의 중심” “아카데미 변화의 핵”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현지시각으로 9일 저녁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출연 배우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현지시각으로 9일 저녁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출연 배우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로스앤젤레스 현지에서 시상식을 지켜본 윤성은 평론가는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시상식 전체를 쇄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퍼져 있었다. 아카데미 회원 구성을 여성, 제3세계 영화인 등 다양화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아시아·제3세계 영화에 새롭게 눈을 돌려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이 맞아떨어진 결과가 바로 <기생충>의 4개 부문 수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할리우드 히어로물마저 여성 영웅, 흑인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등 이런 기류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기생충>의 수상으로 다른 작은 나라의 영화에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수십년간 ‘백인들만의 리그’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아카데미의 변화는 사실 이날 시상식의 초반부터 감지됐다. 배우 겸 팝가수 저넬 모네이가 호스트 없이 오프닝 공연을 장식하며 아카데미의 포문을 열었다. 흑인 여성이자 성적 소수자로 꼽히는 그의 등장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축하 공연 중 주제가상 후보로 오른 영화 <겨울왕국2>의 오에스티(OST) ‘인투 디 언노운’ 무대 역시 다양성에 방점이 찍혔다. 이날 무대에는 원곡 가수 이디나 멘젤뿐 아니라 덴마크·독일·일본·노르웨이·폴란드·러시아·스페인·타이 등 10개국 ‘엘사’가 등장해 현지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아카데미가 미국을 넘은 전세계의 축제임을 천명한 무대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한국계 배우인 샌드라 오 등 각 부문의 시상자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안배한 점도 눈에 띄었다.

시상자로 나선 배우 시고니 위버는 아카데미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의 키워드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이 ‘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캡틴 마블>을 연기한 브리 라슨, <원더우먼> 갈 가도트와 함께 무대에 서 “모든 여성이 슈퍼히어로”라고 치하했다. 이어 음악상을 수상한 <조커>의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음악감독 역시 “모든 여성, 소녀들, 어머니들, 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꼭 목소리를 내시기 바란다. 우리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92년 역사 중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그 의미를 더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변화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일부의 비판도 나왔다. 연기상 부문 후보에 지명된 유색인종 배우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신시아 어리보(<해리엇>)가 유일하다는 점, 감독상 후보에 여성 감독이 없다는 점 등이 비판의 핵심이다. 남우조연상을 시상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배우 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은 “정말 훌륭한 감독이 후보에 올랐지만 여성 감독이 빠졌다”고 지적했으며, 함께 무대에 오른 스티브 마틴도 “지난 92년 동안 얼마나 아카데미가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라. 1929년에 흑인 후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2020년에는 딱 한명이 있다. 정말 많이 변했다”며 아카데미의 여전한 한계를 위트있게 꼬집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