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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당신들의 ‘직권남용죄’ / 황필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21. 05:51

[세상 읽기] 당신들의 ‘직권남용죄’ / 황필규

등록 :2020-02-20 18:31수정 :2020-02-21 02:08



 

황필규 ㅣ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정작 피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의 권리도, 그 고통도 보이지 않는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불이익 조치의 실행 주체인 각종 위원회 직원들은 의무 없는 일을 한 딱한 사람들이 됐다. 그 실무를 총괄한 송수근 태스크포스(TF) 단장 이하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모두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기무사 사찰 사건도 비슷하다. 사찰을 행한 기무사 현장 요원들은 모두 의무 없는 일을 한 불쌍한 사람들이 됐다. 대다수 가해자가 피해자처럼 규정되는 기이한 구조다.

재판이나 수사와 관련해 판사나 검사는 직권남용죄의 주체도 객체도 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당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담당 검사에게 전화로 해경에 대한 압수수색 중단을 요구했다. 기존 압수수색영장은 사실상 폐기됐고 그 집행은 지연됐다. 직권남용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임성근 부장판사는 담당 재판부에 요구해 판결 이유를 고치고 정식재판을 약식명령으로 둔갑시켰다. 법원은 임 부장판사가 타 재판부에 대한 재판 개입의 직권이 없고, 그 결과도 각 재판부가 자체 판단한 것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관의 독립성 원칙이 오히려 그 권리 침해를 부인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 성립한다(형법 제123조). 결국 안 할 것을 하게 하거나 할 것을 못 하게 하여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정치적인 이유에서건 수사의 편의를 위해서건 주로 ‘공무원이 공무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경우’에 적용되는 범죄가 되어버렸다. 동일한 법 조항이 일본에서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민간인 불법사찰이 있었다. 블랙리스트 작성과 불이익 조치가 있었다. 재판 내용과 절차에 대한 개입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진실을 추구할 권리,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구체적인’ 권리가 ‘현실적으로’ 철저히 침해당한 이들의 고통과 절망, 피눈물이 있었다. 그러나 공소장과 판결문에는 피해자가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와 피해 내용은 ‘의무 없는 일’의 대상과 내용일 뿐이다.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유신 시절 정도의 권리 개념이나 의식을 갖고 접근하지 않고서야 이처럼 권리와 그 침해가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라는 범죄구성 요건을 애써 외면하고 피해자와 피해자의 권리를 배제한 채, 공무원의 ‘의무 없는 일’에만 집착하면 필연적으로 상당수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최초 지시를 내린 사람과 최종 행위를 한 사람 사이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경우, 검찰의 자의적인 판단이 공범과 의무 없는 일을 한 사람을 가른다. 가해자 모두를 피해자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공범으로 기소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직권남용일 수 있다.

‘직권’은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한 사항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 직무권한’은 해석에 따라 그 범위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남용’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의 요소가 포함되면 더 이상 ‘직권’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재판 ‘개입’이 대표적이다. 재판 개입의 직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재판 개입에는 이미 남용적 요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직권’을 그 당시 그 공무원의 자리 혹은 직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권한으로 해석한다면 재판 개입도 어렵지 않게 직권남용에 포섭될 수 있다. 법원과는 달리 여러 ‘독립된’ 위원회의 심사에 대해서는 외부인의 직권남용죄가 다수의 판례를 통해 확인됐다. 피해자의 침해된 권리를 중심으로 관련자 모두를 공범으로 구성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피해자의 법감정에 정면으로 반하는 법 적용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다는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법 적용은 사법체계의 근간을 뒤흔든다. 유사한 사건을 놓고 범죄의 주체와 대상을 자의적으로 정하거나 제외할 수 있는 법 적용은 법 적용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나. 아무렇지 않게 피해자의 권리를 부정하며 ‘원만한’ 판사 혹은 검사 공동체의 법리 아닌 법리를 구축해온 법원과 검찰의 반성의 목소리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