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기독신앙인물탐구

[스크랩]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8:52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Ⅰ. 서론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는 독일의 성직자·성서학자·언어학자로써 작센 아이슬레벤 출생이다.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그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다.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Ⅱ. 시대적 배경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사상가가 배출되었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전 유럽인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우뚝 서있었으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혁명적인 신이론을 체계화한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였다. 시대의 대세는 이미 변화와 창조적 활동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 그 동안 묶여있던 중세사회 체제를 단숨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이 곁코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발전적 인간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산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 내버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무정해졌고 강퍅해졌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16세기 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과 흥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화가나
조각가들이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잘 묘사한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대신 무지개 위에 앉아 죄인을 하나 하나 정죄하는 무서운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림 속 그리스도의 오른쪽 귀에는 백합, 왼쪽에는 칼이 있었다. 칼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백합화는 부활하여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을 상징하였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절박한 심령으로 무거운 짐을 메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오히려 "최선을 다하라" 곧 행동으로 백합화를 얻으라고 말해 무거운 짐을 더 언지는 것을 조장했다.
그 당시에 구원이란 개인의 최선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래서 순례, 구걸, 성자와 성물숭배와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이들의 영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술 더 떠 성인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여 진열하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만약 고해성사를 게을리하면 결국 연옥으로 떨어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고 으스름을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 전쟁시에 고안된 면죄부는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되었다. 얼마나 죽음과 심판의 공포가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이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Ⅲ. 생애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오에서 학교교육을 받았고 1505년 에르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해 여행 중 갑작스런 벼락에 놀라, 죽음의 공포를 느껴 수도사가 될 것을 맹세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오캄주의의 신학교육을 받고, 1508년 당시 신설한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일반교양과목을 가르쳤고, 12년 신학박사가 된 후 성서학을 가르쳤다.
그 동안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어 자신의 죄에 절망하지만,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의 뜻>을 발견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인식이라고하는 새로운 신학의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강의하였고, 죄의 사면을 위해 제정된 고백성사(告白聖事)에 의문을 품었으며, 독일 작센지방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교황의 면죄증서(면죄부)에 대해서 학문상의 토론을 할 목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유명한 <95개조의 논제>를 당시 대학 게시판이기도 했던 비텐베르크성교회의 문에 게시했다.
이 논제는 순식간에 전독일에 퍼져 종교개혁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그가 소속된 수도회의 총회가, 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려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사절인 카예타누스의 심문을 받고 이 95개조의 철회를 요구당하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신학자 에크와의 토론에서 교황도 과실을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과 결별하였고, 20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태워버렸다. 521년 보름스국회에 소환되어 추방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숨어, 급진혁명가의 소요를 누르고 복음주의교회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Ⅳ. 저서
루터의 저서는 60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책이 100권이 넘는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모든 프로그램을 제시했던 <그리스도교인의 신분개선에 관한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1520)>,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에 대하여 비판한 <교회의 바빌론 포로(捕虜,1520)>, 신앙과 사랑 위에 선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을 논한 <그리스도교인의 자유(1520)>가 있다. 또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신의 은혜의 절대성을 역설한 <노예의지론(1525)>과, 황제에 대한 저항권을 설명한 <사랑하는 독일국민에게 권고함(1531)>, 교리를 쉽게 쓴 <대교리문답서(1529)>, 신앙에서 형성되는 윤리를 설명한 <선행에 관해서(1520)>등이 뛰어난 저서이다.
그의 성서강의는 초기의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이어 완성기에 들어가면 <갈라디아서>와 <창세기>의 강의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로마서> 강의는 종교개혁적 사상이 완전히 결실되고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이 확립되고 있다.


Ⅴ. 사상

루터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트의 3원리로 요약된다.
그것은 <오직 신앙> <오직 성서> <만인사제성(萬人司祭性)>이고, 그 중에서도 <오직 신앙>의 원리야말로 루터의 신앙의인론을 표명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캄주의에 따라 의인(義認;하나님이 인간을 義人으로 인정)을 위해서 여러 준비를 하고, 선행의 공적을 쌓아 구제받으려고 고투하지만, <신의 의(義)>라는 것은 신이 우리들에게 구하려는 올바름이 아니고 신앙에 의해서 신이 내리시는 올바름인 것을 알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미 교회가 받은 <면죄>는 절대 불필요한 것이며, 회개도 의식이 아닌 <마음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Ⅵ. 종교개혁

가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聖事)에 있다고 하고, 특히 회개(고백)의 성사가 인간을 속죄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속죄는 선행으로 얻어지는 데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免罪符)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건설을 위하여 면죄를 고시하고, 독일에서 면죄부의 판매를 허락하였다.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되어 마구 팔렸다.
루터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삼으로써 모든 벌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며 확실히 구제된다고 믿는 사실에 종교적 위기를 느꼈다.
금전에 의한 면죄부의 구입이라는 안이한 행위에는 <회개>라는 그리스도신자의 기본적 행위가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된 <95개조논제(1517)>에서는 로마에 의한 독일의 재정적 착취를 문제삼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원리를 제시하였다.
루터는 이 논제의 제1조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는 일평생 회개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고, 제36조에서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赦免)>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제28조에서 하느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람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며(義認說), 그 믿음의 근거는 성서밖에 없다(성서주의)고 확신하였다.
이 확신은 다시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를 이끌어 냈다.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1520)>에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진실로 교회적 신분에 속하며 서로간의 직무상의 구별 이외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하여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특별한 신분 특권을 가진 성직자 계층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근원적 주장은 가톨릭교회체제(敎階制度)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1519년 가톨릭신학자 에크와 가졌던 라이프치히토론회에서 루터는 교황의 교의상의 권위와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부정하였고, 20년에는 교황의 파문협박장을 공공연히 태워버렸으며, 21년 보름스국회(제국의회)에서는 황제 카를 5세의 면전에서 행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므로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았다(보름스칙령).
이와 같은 신념에 근거한 루터의 영웅적 행위는 독일국민 각계각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개혁운동은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은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한때 은신했다.
한편 국민 각계층은 이 무렵부터 루터의 교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루터로부터 이반(離反)해 나갔다.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카를슈타트가 교회관습의 구체적 변혁을 지향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켰다. 22년 지킹겐이 이끄는 제국기사가 <기사의 난>을 일으켰으며, 24년에는 독일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농민들은 성서를 방패로 촌락에 의한 목사의 임면권, 십일조(十一條) 폐지, 농노제의 폐지, 공조(貢租)·부역의 경감, 공유지의 확보 등을 요구하며 봉기하였다. 당초 루터는 농민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농민편에 서서 영주측의 양보를 요구하고 중재재정적(仲裁裁定的) 해결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뮌처가 튀링겐지방의 농민을 이끌고 사회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활동하자 농민을 철저히 탄압할 것을 제후에게 호소하였다.
<반란을 일으키는 영혼의 소유자에 관하여 작센의 제후에게(1524)>에서는 뮌처의 폭동적 성격을 논하고, <농민의 살인, 강도단에 대항하여(1525)>에서는 영주들을 고무·격려하고 반란농민의 철저한 처형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농민들의 주장과 행동이 영적 사항과 세속적 사항을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양자의 명확한 구별 위에 세워진 루터의 세계관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25년 인문주의자의 대표인 에라스무스와도 갈라섰다. <인문주의 없이는 종교개혁도 없다>고 하듯이 당초 인문주의자는 루터를 지지하고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파문이 확정될 무렵부터 인문주의자들은 루터를 지지하는 자와 가톨릭에 머무르는 자로 나뉘면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1524)>, 이에 응한 루터의 <노예의지론(1525)>으로 인하여 양자는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처럼 국민 각 계층이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이탈하자 개혁운동은 영방제후(領邦諸侯)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갔다.
독일농민전쟁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개최된 26년의 슈파이어국회에서 <일반공의회 또는 국민회의의 개최까지>라는 조건부이기는 하나, 제후는 <신과 황제에 대해서 책임질 것을 기대하면서, 다만 확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생활하고 통치하며 사태를 처리해야 한다>고 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결의에 입각해서 루터파 제후는 영내의 종교적 정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작센선제후령 내에서는 <순찰자를 위한 훈령(1527)>을 발표하고 루터파 신학자 가운데서 순찰자를 임명하여 영내의 종교와 교육사정을 시찰하게 하여 종교적 통일을 꾀하였다.
이 순찰교회제도는 종교적 통일을 꾀하는 동시에 영내의 정치적 안정도 확보한다는 사실상의 영방제후 교회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져 갔다. 이후 종교개혁은 주로 영방제후들이 담당하여 전개하였다.

Ⅶ. 결론
루터의 종교개혁을 평가해 보자면 다른 일반역사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신약성경(특히 바울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미 주장했던 믿음으로 칭의되는 원리의 재발견이다. 둘째,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를 제도 교회나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인정하여 중세 천년 동안이나 가두어둔 말씀에 얽혀있는 사슬을 풀어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이 제도나 의식의 중개없이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넷째,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성속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배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제나 수사가 평신도 보다 더 고귀하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섯째,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영국인 틴 데일의 영어성경이 좋은 예이다. 여섯째, 루터는 화목하고 따뜻하며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몸소 이룸으로써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에 직, 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카톨릭 내부의 갱신과 개혁을 이루게 했다(counter reformation)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점을 찾아 본다면, 첫째, 카톨릭 교회의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던 수도원의 패쇄를 주장함으로 중세 내내 문화의 보존, 빈민구제, 교육 등과 같이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준교회격인 수도원들이 더 이상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게 길을 차단하였다. 이는 수도원의 선교영역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둘째,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포함되었다(The Word of God contain in the Bible)고 함으로써 성경의 총체적 권위와 절대 무오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성경의 선별적, 차등적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성경의 권위를 축소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두 왕국론을 주장함으로써 성소가 정치압제자나 독재자에 대한 과감한 저항을 할 수 없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루터파의 신학적 유산은 결국 나찌 히틀러의 독재를 허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넷째, 독일 농민봉기시 항쟁하는 농민들에게 과격한 진압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농민 사상자를 내었다.



독일의 성직자·성서학자·언어학자. 작센 아이슬레벤 출생.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그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다.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생애]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 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오에서 학교교육을 받았고 1505년 에르푸르트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해 여행 중 갑작스런 벼락에 놀라, 죽음의 공포를 느껴 수도사가 될 것을 맹세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오캄주의의 신학교육을 받고, 1508년 당시 신설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일반교양과목을 가르쳤고, 12년 신학박사가 된 후 성서학을 가르쳤다.

그 동안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어 자신의 죄에 절망하지만,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의 뜻>을 발견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인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학의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강의하였고, 죄의 사면을 위해 제정된 고백성사(告白聖事)에 의문을 품었으며, 독일 작센 지방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교황의 면죄증서(면죄부)에 대해서 학문상의 토론을 할 목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유명한 <95개조의 논제>를 당시 대학 게시판이기도 했던 비텐베르크성교회의 문에 게시했다.

이 논제는 순식간에 전 독일에 퍼져 종교개혁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그가 소속된 수도회의 총회가, 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려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사절인 카예타누스의 심문을 받고 이 95개조의 철회를 요구 당하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신학자 에크와의 토론에서 교황도 과실을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고, 20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태워버렸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추방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숨어, 급진혁명가의 소요를 누르고 복음주의교회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저서]
루터의 저서는 60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책이 100권이 넘는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모든 프로그램을 제시했던 <그리스도교인의 신분개선에 관한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1520)>,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에 대하여 비판한 <교회의 바빌론 포로(捕虜,1520)>, 신앙과 사랑 위에 선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을 논한 <그리스도교인의 자유(1520)>가 있다. 또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신의 은혜의 절대성을 역설한 <노예의지론(1525)>과, 황제에 대한 저항권을 설명한 <사랑하는 독일국민에게 권고함(1531)>, 교리를 쉽게 쓴 <대교리문답서(1529)>, 신앙에서 형성되는 윤리를 설명한 <선행에 관해서(1520)>등이 뛰어난 저서이다.
그의 성서강의는 초기의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이어 완성기에 들어가면 <갈라디아서>와 <창세기>의 강의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로마서> 강의는 종교 개혁적 사상이 완전히 결실되고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이 확립되고 있다.

[사상]
루터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트의 3원리로 요약된다.
그것은 <오직 신앙> <오직 성서> <만인사제성(萬人司祭性)>이고, 그 중에서도 <오직 신앙>의 원리야말로 루터의 신앙의인론을 표명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캄주의에 따라 의인(義認;하나님이 인간을 義人으로 인정)을 위해서 여러 준비를 하고, 선행의 공적을 쌓아 구제 받으려고 고투하지만, <신의 의(義)>라는 것은 신이 우리들에게 구하려는 올바름이 아니고 신앙에 의해서 신이 내리시는 올바름인 것을 알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미 교회가 받은 <면죄>는 절대 불필요한 것이며, 회개도 의식이 아닌 <마음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
14세기에 일어났던 위클리프와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실패하였으나, 르네상스의 물결을 타고 시민들의 의식이 높아지자 새로운 종교 개혁 운동이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6세기초에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 성당 재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독일인들에게 면죄부를 팔았다. 이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신앙의 바탕은 교황이나 교회가 아니라 성서, 곧 하느님의 말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교황 및 종교 회의의 결정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일찍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된 후스의 의견에도 진리가 있다고 함으로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였으나 루터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종교 개혁의 굳은 의지를 보여 주었다.
이 때 황제의 세력을 반대하는 일부 제후와 자치를 바라던 도시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나섰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독일에서는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도(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도 사이에 종교 전쟁이 벌어졌다. 이에 독일 황제도 할 수 없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1555년).

[영향]
루터교 (Lutheranism)

서방 그리스도교의 일파.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장 칼뱅, 성공회 등 여러 종파와 대립되는 마르틴 루터의 신앙원칙을 받아들였다.
루터교는 자신들을 개혁주의자라기보다 복음주의자라고 부르지만 늘 엄격한 것은
아니다.

루터교를 정의하고 이해하려면, 루터의 개인체험과 그의 성서연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1517년 유명한 <95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 반박문에서 그는 면죄부와 중세 후기 유럽 교회의 신학과 성례전에 대해 논박했다. 1521년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루터파'라는 명칭이 루터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이고 많은 경우 비웃음과 종파주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데도 그 명칭을 받아들였다. 루터파 운동은 바텐베르크대학교에서 시작하여 거의 독일 전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퍼졌는데, 이들 지역에서 루터교는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16세기와 17세기는 루터 당시의 신학적 열정은 사라져버리고 무미건조한 정통주의에 길을 내주었다.
이에 대한 반동이 경건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났다. 그들은 올바른 교리의 확립과 살아 있는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신앙뿐만 아니라 선교와 자선사업도 장려했다.
18세기 루터교는 합리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세기에는 정통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는데, 특히 덴마크 감독이며 시인인 그룬트비를 통해서였다. 그룬트비와 동시대 인물이며 같은 덴마크 출신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바탕이 된 고도로 인격화된 철학을 통해 정통주의와 국가 교회를 비판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