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박한식의평화에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14. 04:46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등록 :2020-04-13 22:48수정 :2020-04-13 23:02

 

미국 학계 ‘표절 주장’ 논문들 유통
“마오 존경하지만 수용 불가한 주장”

김일성-마오 실존적 삶의 조건 ‘비슷’
“모두 외세와 싸우며 독립국가 건설”

‘마오’ 리다자오의 마르크스이론 계승
‘중국 현실 맞게 농민 주도 인민혁명’
‘대내외 모순 극복 위해 2단계 혁명론’
매국노 ‘척결’-토지개혁 등 인민 ‘우대’

‘김일성’ 외세·빈부격차 이중의 과제
‘주체교육으로 혁명주체 인민 양성’
‘평등 분배 사회주의 대안으로 채택’

항일 유격대 활동 ‘건국의 정신’ 공통

 

길을 찾아서-28회 북한과 중국의 특수관계

박한식 교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주장하는 ‘주체사상의 마오쩌둥사상 표절론’에 대해 유사성과 차이점을 들어 비판한다. 무엇보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모두 외세에 맞선 유격투쟁을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한 까닭에 ‘혁명 동지’라는 특수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일성(왼쪽)과 마오쩌둥(오른쪽)이 1954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5돌에 베이징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을 나란히 참관하고 있다. 사진 경화시보 제공

 

“주체사상은 마오쩌둥사상을 표절한 것이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주체사상 연구 문헌을 검토하다 보면 종종 보이는 ‘주장’이다. 심지어 저 주장을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도 있다. 나는 그때마다 당혹감을 느끼면서 깊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오쩌둥(모택동)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한다. 마오쩌둥은 굶주림에서 허덕이는 약 6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큰 문제가 세가지 있다. 첫째 문제는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고, 둘째 문제도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며, 셋째 문제도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아편에 중독된 약 2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치유했다.내가 볼 때 마오쩌둥은 네개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혁명 지도자의 모자, 정치가의 모자, 학자의 모자, 유격대장의 모자가 각각 그것이다. 마오쩌둥은 그처럼 다양한 모자를 쓰고서 중국 인민의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는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그래서 조지아대의 내 연구실에는 항시 마오쩌둥 사진이 걸려 있었다. 또한 대학원에서 수년 동안 마오쩌둥사상을 연구하는 세미나를 개설해서 운영했다.나로서는 강단에서 내내 연구한 마오쩌둥사상과 직접 북한을 오가며 확인한 주체사상을 비교할 때, 후자가 전자를 표절했다는 주장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물론 나 역시 두 사상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유사성은 대부분 마오쩌둥과 김일성 각자의 실존적 삶의 조건이 상당 부분 유사한 데서 파생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외세와 싸우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삶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주체사상이 마오쩌둥사상을 표절했다면 중국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사상은 중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검증된 사상이고,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검증된 사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체사상을 체제이념으로 선택한 북한이 70년 넘게 생존했다는 사실은 주체사상이 북한 특유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검증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주역인 리다자오의 탄생 100돌 기념 우표. 마오쩌둥은 리다자오(왼쪽)의 마르크시즘을 바탕으로 ‘인민혁명’을 전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주지하듯 마오쩌둥은 마르크스 혁명 이론을 중국 현실에 맞게 수정한 리다자오(이대소)의 사상을 계승해서 인민혁명을 전개했다. 마르크스는 산업사회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계급투쟁에 기초를 둔 혁명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리다자오가 볼 때 마르크스 혁명 이론은 중국의 현실에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아직 농촌사회에 머물러 있는 중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분화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다자오가 볼 때 중국의 현실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는 중국의 농민이 마르크스가 주목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리다자오는 중국의 농민이 주역이 되는 인민혁명의 노선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노선은 마오쩌둥을 통해서 실현되면서 현대 중국을 탄생시켰다. 1982년 베이징대 졸업생들이 성금을 모아 교정에 리다자오의 동상을 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마오쩌둥은 1918~20년 베이징대 문과대 교수였던 리자다오의 첫 조교로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17년 베이징대를 방문해 리다자오의 동상을 찾아본 집필자 이현휘 박사.

 

김일성 역시 리다자오나 마오쩌둥처럼 현실과 유리된 사상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그런 사고방식은 주체사상 전체를 일관하는 정신으로 구현되었다. 예컨대 김정일의 노작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혁명과 건설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다 들어맞는 처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문제를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마오쩌둥과 김일성, 각자가 처한 삶의 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본 다음, 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차이점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1893년에 태어난 마오쩌둥은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시작된 이른바 ‘백년국치’(Century of Humiliation)의 와중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도 중국 군부는 각종 군벌이 난립하는 상태에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마오쩌둥은 자신이 처한 중국의 현실에서 두개의 모순을 간파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이 야기하는 대외모순이고, 다른 하나는 빈부격차 문제, 지역감정 문제, 소수민족 문제 등이 야기하는 대내모순이었다. 마오쩌둥은 두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2단계 혁명론을 채택했다. 마오쩌둥이 볼 때 대외모순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외세에 영합하는 중국의 친미파나 친일파 등과 같은 매국노를 철저히 척결했다. 반면 대내모순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의 전위대가 인민을 교육해서 이끌어나가는 정책, 토지개혁 정책,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 등을 채택했다.김일성 역시 외세를 물리치고 빈부격차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했다. 김일성은 사대주의와 당파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주체교육을 통해서 혁명의 주체인 인민을 양성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만주항일전쟁,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 등을 전개했으며, 국내의 친일파 및 친미파를 철저히 척결했다. 또한 토지개혁 등을 실시해서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43년 10월 5일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대원 시절의 김일성은 조선군 제1영장으로 활동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바탈린(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중국), 왕일지(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중국), 김일성. 사진 중국 길림성 도서관 소장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주역들은 1930~40년대 항일 투쟁 과정에서 연대했던 인연으로 북한과 특별한 혈맹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은 1936년 대장정을 이끌고 시안의 옌안에 정착한 이듬해 여름 중국 공산당의 3대 지도자, 저우언라이(왼쪽부터), 마오쩌둥, 보구가 함께 한 모습이다. 사진 북폴리오 제공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유사한 체험은 특히 유격대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장비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격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대장정 등과 김일성의 만주 유격대 활동 등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이나 김일성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동료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가운데 끈끈한 전우애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유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반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것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유격대 정신은 추후 마오쩌둥의 중국과 김일성의 북한을 건설하는 건국정신이 되었다. 주지하듯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등극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81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덩샤오핑(등소평)은 마오쩌둥 격하 운동을 전개한 적이 없다. 덩샤오핑 역시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이후에도 천안문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사진은 지금까지 내려진 적이 없다.

북한과 중국의 특수한 동맹 관계는 1976년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 시대에도 이어졌다. 1981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왼쪽)이 이듬해 4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오른쪽)과 함께 환영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동료들이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북한을 ‘유격대 국가’로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2012년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관람한 적이 있다. 대규모 군인들이 행진을 하는데, 맨 앞줄에서 유격대 복장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걷고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유격대 정신이 여전히 건국정신으로 살아 있다고 느꼈다.

2012년 4월15일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국내외 언론은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첫 대중 연설을 한 것에 주목했다. 박한식 교수는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를 재현한 부대가 열병식 선두에 등장해 인상적이었다. 사진 인민망 제공

2012년 4월15일 박한식(네째줄 오른쪽 세째) 교수는 부인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을 현장에서 관람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북한은 2012년 4월15일 태양절 열병식 이래 국가 기념행사 때마다 항일 유격대를 재연한 부대를 등장시켜 건국 정신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2017년 태양절 열병식 때 유격대 모습. 사진 텅쉰망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의 극심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식량을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 대신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필요’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채택했다. 김일성이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도 마오쩌둥이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현재 북한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채택한 중국보다 사회주의의 평등의 원칙을 훨씬 철저하게 구현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다.물론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평등의 원칙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북한의 임금체계는 최상위직과 최하위직 간에 2배 이상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북한에서는 경제적 평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등도 실현되었다. 북한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규범 중 하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한다”는 집단주의 정신이다. 따라서 ‘왕따’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생산수단의 공유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계급 자체가 존재할 수 없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갑질’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에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굶었다. 오히려 당 간부 등과 같은 지도층 인사들이 더욱 많이 희생되었다. 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차이점을 확인하고자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개념은 ‘인민’이다. 중국의 정식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인민은 두 나라의 국호에서 키워드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인민이 의미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중국에서 인민은 한족과 54개 소수민족을 모두 포괄하는 ‘국민’ 개념이다. 반면 북한에서 인민은 동일한 혈연에 기초를 둔 ‘민족’ 개념이다. 따라서 중국의 민족주의는 포용적 성격(inclusive nationalism)을 지닌 반면, 북한의 민족주의는 배타적 성격(exclusive nationalism)을 지니는 차이가 있다. 또한 마오쩌둥사상은 철저히 정치적 성격을 지녔지만, 주체사상은 정치적 성격뿐만 아니라 종교적 성격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양자는 큰 차이가 있다.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유사성과 차이성은 중국과 북한 간의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제정치학에서 ‘특수한 관계’란 영국과 미국 간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역사적, 문화적 차원 등에서 유지되는 특별한 유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 역시 영국과 미국의 관계 못지않은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36년 2월 만주 영안현 남호두에서 열린 회의에서 김일성이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부대의 항일연합군 결성을 제안하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 사진 <우리민족끼리>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만주에서 공유한 항일유격대 경험을 살펴보면 중국과 북한 간의 ‘특수한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36년 2월27일 ‘남호두회의’(南湖頭會議)에서 이렇게 보고했다.“다 알다시피 현재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중항일무장부대 내에서 주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 부대 내에서도 적지 않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정치군사 간부로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조중항일무장부대를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갈라 편성한다면 형제적 중국인민의 항일무장역량을 약화시키게 되며 결국 조중인민의 항일무장투쟁 발전에 손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계속 동남만의 대산림지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조선인민부대와 중국인민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제각기 활동할 것이 아니라 항일연합군의 이름으로 반일무장투쟁을 공동으로 조직전개해야 합니다.”마오쩌둥은 만주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를 발판으로 중국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중항일무장부대는 마오쩌둥에게 그 발판을 제공한 주역이었다.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 가면 만주 지역의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곳을 방문해서 조선인의 수를 일일이 헤아려 수첩에 기록한 적이 있다. 기념관에는 230여명 정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조선인은 무려 100여명에 이르렀다.

1962년 10월 평양에서 맺은 ‘북-중 국경조약’ 때 중국은 북한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합의해줬다. 이에 앞서 1961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김일성(왼쪽) 주석과 저우언라이(오른쪽) 총리가 ‘북-중 우호조약’을 맺고 있다. 저우언라이 오른쪽 바로 뒤로 덩샤오핑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저우언라이(주은래)와 김일성은 1962년 10월12일 평양에서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했다. 백두산 일대 ‘북-중 국경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북한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해주었다. 예컨대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4.5%,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과 모래톱 중 264개를 차지하고, 중국은 천지의 45.5%, 187개의 섬과 모래톱만을 차지했다.저우언라이는 1976년 사망했다. 1975년 4월 중국을 공식 방문한 김일성은 저우언라이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병석에서 일어나 정장을 하고서 김일성을 맞이했다. 그 자리에 덩샤오핑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앞으로 북한에 무슨 일이 있으면 덩샤오핑을 찾으시오”라고 말해주었다. 1979년 5월, 김일성은 흥남비료공장 안에 저우언라이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막식에 직접 참여했다.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연재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