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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깃발 든 보수, 불행한 공동체 / 조형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4. 05:02

[세상읽기] 깃발 든 보수, 불행한 공동체 / 조형근

등록 :2020-05-03 17:32수정 :2020-05-04 02:38

조형근 ㅣ 사회학자

 

라운드 종료의 벨이 울린다. 펀치를 멈추고 코너를 향해 돌아선 매기를 챔피언이 공격한다. 반칙이다. 매기는 넘어지면서 1, 2번 경추가 부러진다. 전신불수가 된 매기 앞에서 평생 그녀의 등골을 파먹어온 가족들이 보상금을 놓고 다툰다. 매기는 혀를 깨문다. 모질게도 응급처치로 살아난다. 트레이너 프랭키를 향한 눈빛이 갈수록 처연하다. 마침내 결심한 그가 한밤, 병원을 찾아서 매기의 호흡기를 떼어내고 치사량의 아드레날린을 주사한다. “모쿠슈라, 너에게 붙여준 이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나의 혈육이란다.” 매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프랭키는 매기를 안는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결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보수주의 세계관은 여기서도 시리고 아프다. 이익만 좇는 세상에는 불의와 배신이 넘친다. 늙은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는 서른한살에 복싱을 시작하겠다는 여급 매기를 단호히 거절한다. 삶이 아무리 신산한들 복싱은 여자의 일이 아니다. 결국 받아들이지만 평등한 파트너로서는 아니다. 그는 약자와 연대할 줄 모른다. 대신 연민한다. 무한히 책임지려 한다.왜일까, 보수가 몰락한 총선 결과 앞에서 이 영화가 떠올랐다.

 

유권자 지형이 보수 우위에서 진보 우위로 전환된 재정렬 선거라는 분석에서부터 코로나 정국이 낳은 우연한 결과라는 진단까지 평가가 다채롭다. 부정선거라는 주장은 웃고 넘기자. 한때 이쪽도 그랬다. 아무튼 이런 평가는 내 몫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수주의라는 정치 신념에 대한 심한 갈증을 토로하고 싶다. 왜 이렇게 추락했을까? 새로 설 가능성은 있을까?나도 한국 사회에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자리 잡길 바란다. 보수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프랑스혁명 당대의 관찰자 에드먼드 버크의 진단에는 통찰이 있다. 사회를 제 이념대로 개조할 수 있다는 혁명가들의 단순한 믿음, 그 기하학적 설계주의는 곧잘 파국적인 희생을 초래하곤 한다.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버크는 설혹 재건축이 필요하더라도 “무한한 조심성을 발휘”하라고 경고한다. 느리고 착실하게 뒷받침된 진전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보충하고, 조정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인간은 결국 불평등하다거나, 현존 악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늘 더 큰 악을 낳는다는 버크의 보수주의 세계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도 보수주의에는 확실히 신중한 책임감이 있다. 진보가 맹목이 되지 않으려면 배워야 한다.

 

영국 보수당의 정치적 아버지 디즈레일리의 시대에 보수주의가 꽃폈다. 노동조합은 온전한 권리를 획득했고, 공장법이 개선됐으며, 노동자 주택법이 생겼다. 마르크스의 고발이 노동자들에게 퍼지던 1870년대의 일이다. 실질임금도 장기 상승한다. 신중함에 따뜻함을 더했다. 이렇게 보수주의는 귀족과 국교회의 편협한 재산권 옹호론을 넘어 중산층과 노동자, 나아가 공동체와 국가 전체를 책임지고 통합하려는 ‘일국 보수주의’로 확장되었다.새뮤얼 헌팅턴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1957)에서 보수주의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유토피아적 소망의 결여를 꼽는다. 보수주의는 깃발이 없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신중한 현실주의에 가깝다. 자유주의자 하이에크는 이게 불만스러웠다. 3년 뒤 <자유헌정론>의 후기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에서, “진보의 수레바퀴에 달 브레이크”로 만족하지 말고 “자유의 이데올로기라는 깃발”을 내걸자고 촉구했다.디즈레일리가 대변하던 신중하고 책임감 가득한 보수주의는 이제 없다. 있다면 그 대변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따뜻한 보수는 이렇게 스크린 위 판타지로만 남았다.

 

대처와 레이건 이래 현대 보수주의는 하이에크를 따라 시장을 신중한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유토피아’로 숭배하고, 경쟁의 패자를 연민하기보다는 승자를 찬미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 공동체에 코로나19 재난이 확산되자 이데올로기 보수는 신이 나서 저주의 굿판을 벌였다. 당장에라도 나라가 망할 듯 난리더니 막상 전 국민 지원이라는 비상조치는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딴죽이다. 양극화가 역대급인데도 시장과 재산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며 외면한다. 의견이 다르면 무려 사회주의 독재라고 낙인찍는다. 신중하고 현실적인 보수주의자라면 상상도 못 할 언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난무한다. 무책임한 선동의 깃발만 나부낀다. 그러다 졌다. 언제까지 이럴까. 하물며 보수라면서. 우리 공동체가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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