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세상읽기] 나는 계속해서 살 작정이야 / 권김현영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7. 03:17

[세상읽기] 나는 계속해서 살 작정이야 / 권김현영

등록 :2020-05-05 18:13수정 :2020-05-06 02:39

 

지난 3월 빈곤노인기초연금연대 회원과 어르신들이 기초생활수급 노인 기초연금 박탈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보통은 관심 없다고 하고 끊는데 “고객님, 백세 시대에는 은퇴하고 난 다음에도 최소 30년 동안 살아갈 준비를 하셔야 한다는 거예요”라며 보험설계사가 경쾌하게 한 말에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반응을 하고 말았다. 백세까지 살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몸은 조금씩 노화의 신호를 보낸다. 고유명사는 ‘그거’라는 지시대명사로 변환되고 치아, 모발, 피부, 내장기관 전부 지금까지처럼 살아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경고를 보낸다. 백세까지 사는 걸 축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준비한 게 너무 없다. 상념에 빠져 있으려니 전화기 너머에서 또 심장을 옥죄어온다. “백세까지 건강하게 사신다고 해도 지금부터 매달 얼마 이상 준비하셔야 해요.” 괜히 울컥해져서 내 개인정보는 어디서 났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마침 얼마 전 콜센터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다룬 기사를 본 터라 그냥 알겠다고 하고 적당히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답이 안 나왔다. 역시 스위스의 안락사 제도가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 아닐까. 지난 몇 년 동안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찾아본 바에 따르면 스위스에서는 일정 금액을 기탁하면 안락사를 해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이미 많이 신청했다고 한다. 그 사이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회사가 안마의자처럼 생긴 안락사 기계를 발명했다. 이 기계에 누우면 5분 뒤에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아직 관련법이 없어서 스위스에 기계를 납품할 거라는 기사도 읽었다. 역시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이보다 나은 노후대책은 없을 것이다. 외국인은 더 이상 받지 않는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는 방법이 생길 것이라 믿었다. 몇 살에 시행할 것인지만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가 왔다.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 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백세 시대라는 호언장담도, 여기가 아니면 다른 곳 어디선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모두 부질없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제야 스위스, 안락사, 백세 시대 같은 말들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듦에 대해서, 건강하지 않은 몸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해왔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들을 드문드문 읽어갔다. 애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도 코로나 시대에 읽은 책이다. 이 시집에 실린 두 번째 시는 등반 도중 팀원 모두가 사망했던 여성 산악등반팀의 리더였던 엘비라 샤타예바를 기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안다. 고립된 채 그리고 지금은 이곳 높은 곳에서 함께 위험에 처했음을.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힘에 손대지 않았음을.”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함께’ 위험에 처했고,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배우고 있다.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방역은 모두가 함께해야만 효과가 있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더 이상 쉽게 교류하기 어려워졌지만 인간이 이토록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전보다 더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애드리언 리치는 죽음을 앞둔 산악인 엘비라가 꿈꾸었을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생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이보다 덜한 것을 위해 안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백세까지 사는 게 겁이 났던 이유는 삶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라도 치매에 걸릴까 봐, 거동이 불편해질까 봐, 나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민폐를 끼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예측 불가능성을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아주 쉽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 사실 나는 노화와 질병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그 무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안락사가 낫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살 작정이야.”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그래, 나도 계속해서 살 작정이다. 약하고 아프고 불확실한 상태에서 생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두려워한 것만큼 불행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불확실한 가능성의 세계를 조금 더 사랑해보기로 했다.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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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3705.html#csidxfd05aeb3a7969bf8976c3674fb8f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