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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낙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9:09

존 낙스는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물이었다. 그는 1514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한창 성경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출생해 피의 여왕이라 불린 메리가 수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며 개신교를 탄압하고 있을 때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 명문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을 졸업한 낙스는 개혁신앙의 선구자 조지 위샤트의 보디가드로 활동을 시작하며 스코틀랜드를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

1540년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낙스는 루터적이고 반 교황적인 차원의 신앙에서 좀더 적극적인 개혁신앙으로 돌아섰다. 초기 낙스의 활동무대는 세인트 앤드루스였고, 그 가운데 교구 교회와 세인트 앤드루스 성은 중심무대였다.

1547년 4월 낙스는 앤드루스 성에 들어가 교구 교회와 이곳을 자유스럽게 오가며 설교했다. 불꽃튀는 심장에서 우러나는 그의 설교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1548년 위샤트가 순교한 후 세인트 앤드루스 수비대에서 행한 낙스의 첫 설교는 그가 얼마나 선명한 개혁신앙을 갖고 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스승 존 메이저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교수들과 일반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낙스는 다니엘 7장 24, 25절에 근거해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 예배의 근간이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전했다. 심장이 찢어질 듯 놀라운 파괴력을 지닌 그의 설교는 가톨릭의 문제점을 선명하게 제시, 민중들 가슴에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6)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 부흥


칼뱅을 통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과 부흥의 봉화를 높이 든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낙스다. 1560년대 그를 통해 일어난 불길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태동시켰고, 다시 전 세계 장로교 태동의 시발이 되었다.

낙스의 활동 무대 에든버러와 세인트 앤드루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구석구석에는 그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다. 특히 에든버러 시내에는 낙스가 담임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그가 살았던 낙스 하우스,낙스의 개혁사상을 이어간 에든버러 대학교,낙스의 스코틀랜드 개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낙스가 남긴 역사적 흔적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낙스가 매주일 말씀을 선포하며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는 4세기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여전히 스코틀랜드 개혁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그곳은 온통 낙스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교회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스가 묻혀 있다.

낙스의 개혁을 달갑지 않게 여긴 기즈의 메리와 그녀의 요청에 따라 출동한 프랑스군에 의해 포로가 된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 노트르담 호의 노젓는 노예생활을 했다. 주의 은혜로 어렵게 풀려났지만 다시 1553년부터 6년간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기간은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특별히 제네바에 머무는 1555년부터 1559년 동안 그가 목도한 칼뱅의 제네바 개혁은 깊은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이국에서의 망명생활, 유럽의 개혁자들과의 교류, 그들의 작품섭렵, 불타는 조국애는 낙스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이상을 스코틀랜드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강한 힘과 자극을 주었다.

1559년 5월 2일 낙스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왕의 포고에 의해 불법자의 신분으로 낙인 찍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낙스는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망명 중에 습득한 종교개혁 이상을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에 적용해 나갔다.

낙스는 미사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한번의 미사는 백만의 군대보다 무섭다”며 가톨릭 잔재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에게 타협은 곧 저주였다.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야만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역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다 아예 이 교회 담임을 맡아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전역을 휩쓴 개혁과 부흥의 불길이 이곳에서부터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낙스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뜨거운 심장에서 나오는 불꽃 튀는 낙스의 설교가 청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설교를 듣는 이들의 가슴에 개혁의 불, 부흥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낙스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붙들고 루터와 칼뱅이 이룩하지 못한 ‘피 없는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승리했다. 스콧의 메리 여왕은 1561년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선포하였다. 낙스 한 사람의 용기와 설교가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피더니 드디어는 스코틀랜드를 개신교화한 것이다.

사회, 정치, 문화를 종교적 눈을 통해 통찰하는 탁월한 혜안을 지닌 낙스는 단순한 종교개혁 차원을 넘어 사회구제, 평등사상 구현,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을 통해 루터와 칼뱅이 이루지 못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낙스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설립된 에든버러 대학교는 비록 낙스가 직접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낙스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며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이어갔다. 수 세기 동안 이곳은 전 세계 장로교회의 영적 구심점이 되어 왔다. 지난 4세기가 넘게 스코틀랜드가 세계 지성사를 빛냈다면 그 상당한 몫은 존 낙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는 도저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낙스가 거대한 개혁을 이룩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볼 때 그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대적 소명 앞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높이 들었던 낙스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그는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역사 앞에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1572년 11월 24일 에든버러에서 낙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섭정자 모르톤이 “어떤 사람에게도 아첨하거나 역성들지 않았던 자가 여기에 누워있다”고 예찬할 만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7) 청교도운동과 런던

 


청교도운동,영적 각성의 본거지 영국 런던 근교

청교도운동은 초대교회 이후 지구상에 존재한 가장 이상적인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경건의 실천,사회개혁,그리고 영적 각성 운동에 앞서갈 신앙운동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청교도의 영적 각성 운동은 단순히 한 개인의 각성으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져 사회 및 문화변혁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 운동은 근대 부흥운동의 전형적인 모델이고 효시였다.

영국의 여러 곳,특히 런던 근교 베드퍼드,케임브리지대,옥스퍼드대 구석구석에는 청교도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역사 현장을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글로만 접한 신앙의 대선배들의 발자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베드퍼드에서 받은 인상은 너무도 깊고 강렬했다. 존 버니언의 도시 베드퍼드에는 청교도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었다. 버니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는 베드퍼드 도시 한복판의 공원중앙,버니언이 사역했던 기념교회,그에 관한 자료들이 한곳에 모아져 있는 존 버니언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도시 구석구석에 청교도의 체취가 가득했다.

나는 석양 무렵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엘스토로 향했다. 그곳은 고목들이 가득하고 작은 도랑 물이 흐르는 너무도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버니언이 남긴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치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버니언이 노을을 뒤로 하고 내게 다가오는 듯했다. 청교도의 매력은 이들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역만리에 살고 있는 내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역사적으로 청교도 기간은 케임브리지 대학 토머스 카트라이트가 개혁을 외쳤던 1570년부터 1643년 웨스트민스터회의가 열리기까지다. 청교도들은 가톨릭의 예전을 따르는 영국국교가 로마교회로 퇴보할 것을 깊이 우려했다. 이들은 평신도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신앙생활과 윤리생활을 자신의 삶의 모토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설교,삶,신앙서적을 통해 영적 각성을 선도했고 이 영적 각성은 곧 영국과 신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같은 청교도 영향력의 근원은 한마디로 개혁정신에 뿌리를 둔 경건(piety)이었다. 청교도의 라틴어 푸리타니(Puritani)란 말이 시사하듯 청교도들은 거룩한 삶,깨끗한 양심을 추구했다. 이들은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감격하며 날마다의 삶에서 경건을 실천에 옮겼다. 이들에게 경건은 삶의 형태이며 방법이었다. 신앙과 삶이 괴리되지 않았다. 신앙이 삶이었고 삶이 신앙이었다.

청교도들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외쳤고 그런 방향에서 청교도 공동체를 이끌어 갔다. 이들은 나단 해치가 말한 대로 사회 국가 교회 개인을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이해하고 사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승화시켰다. 경건이 사적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영역 모두를 지배했다. 청교도가 기독교 역사에 존재했던 가장 이상적인 신앙의 공동체로 평가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청교도의 경건이 위대한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인격적 회심과 회개의 삶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회심이란 한 개인이 자연 상태에서 은혜 상태로 나아가는 총체적인 과정을 의미했고 이 회심은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죄악에 대한 회개,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사죄에 대한 확고한 소망,그리고 모든 악과 죄에 대항하는 영적 전투는 이들이 강조했던 세 가지 강조점이었다.

청교도들은 청중을 향해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십시오”라며 직설적으로 회개를 촉구했다. 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경건의 실천,기도의 실천 가운데 나온 외침이었다. 이들은 식사 때,식사 후,저녁에 귀가할 때,해질 녘,불을 켤 때 기도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도 영적 각성을 사모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오 나의 파수군이요 보호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나를 보살펴주소서. 당신 안에서 나의 육신을 안식하게 해주시고 나의 혼이 깨어서 경성하게 하소서.”

자연히 회개는 청교도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존 버니언의 회심의 결정체 ‘천로역정’은 청교도 영적 각성의 집약체이다. 이 책은 죄악에 깊이 잠들어 있던 수많은 영혼을 각성시켰다. 길선주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 지도자들 상당수가 ‘천로역정’을 통해 주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청교도 영적 각성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과 더불어 경건주의 운동에 영적,사상적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평생 동안 경건을 실천에 옮기며 청교도 영적 각성을 선도했던 존 오웬,존 버니언,리처드 백스터,윌리엄 퍼킨스 등과 그들 제자들을 통해 청교도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청교도 정신에 토대를 둔 경건주의 운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청교도 운동은 시공을 넘어 깊고 넓게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받고 영적 각성 운동의 선구자로 쓰임 받았던가! 지난 3세기 동안 참된 부흥을 경험하기를 사모하는 곳마다 청교도 정신이 살아숨쉬고 있었다.

조너선 에드워즈,조지 휘트필드,존 웨슬리,칼뱅주의,감리교 부흥,19세기 아일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 부흥,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이르기까지 청교도운동은 근대 영적 각성의 중요한 회심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7) 근대 영성각성의 선국자들

 

존 오웬,존 버니언,리처드 백스터,윌리엄 퍼킨스는 모두 개인적인 경건을 실천하고 성령에 의한 영적 각성을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피터 툰이 대표적 청교도 신학자라 불렀던 회중파 청교도 존 오웬(1616∼83)은 청교도 경건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 속에서 직접 실천에 옮긴 근대 영적 각성의 선구자였다. 특히 그는 성령론의 정립과 경건 실천을 통해 ‘청교도 경건’ 혹은 ‘청교도 영성’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역사에 태동시킨 주인공이었다. 인간의 회심,구원 사역,교회 공동체의 영적 생활에서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사역하신다는 사실을 그처럼 선명하게 밝힌 사람도 드물다.

런던 근교 베드퍼드 엘스토에서 떠돌이 땜쟁이 아들로 태어난 버니언은 분명한 회심을 체험하고 청교도 각성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 버니언은 12년 동안 옥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60여명의 양심수들에게 소망과 구원의 진리를 들려주었다. 성경 다음으로 수많은 죄인을 주님께 인도한 ‘천로역정’은 버니언 자신의 경건과 뚜렷한 회심의 결정체였다.

청교도 부흥을 대변하는 또 한 명의 인물 리처드 백스터는 영국 키더민스터 교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자신이 맡은 양떼들을 영적인 잠에서 깨우고 자신의 저술을 통해 수많은 목회자들을 각성시켰다. 백스터의 사역과 작품은 그가 얼마나 회심 받지 못한 자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퍼킨스 역시 청교도 영적 각성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던 퍼킨스는 한 사건을 경험했다.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어떤 집에서 어머니가 자녀에게 “입 다물어. 아니면 저기 주정뱅이 퍼킨스에게 데려갈 거야”라고 야단치는 것을 들었다. 순간 퍼킨스는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고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그 후 퍼킨스는 매일의 삶에서 경건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신학은 삶과 괴리되지 않았다. 그에게 신학이란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8)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역사적으로 경건주의 운동은 청교도 운동과 더불어 개인의 영적 각성이 공동체의 영적 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부흥의 모델이었다. 이 운동은 1670년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중엽까지 가장 강력한 신앙운동으로 뿌리내렸다. 그 대변자는 슈페너,프랑케,진젠도르프였고 이들의 주활동무대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할레,그리고 헤른후트였다. 이 도시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독일에 있었다. 나는 독일을 넘어 세계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경건주의 운동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독일로 달려갔다.

영국 히드로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3시45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나는 곧 바로 슈페너(Phillip Jacob Spener·1635∼1705)가 사역했던 바울교회로 달려갔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막 접어들면서 차안에서 바라본 다운타운의 모습은 과거와 현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세련된 고층 건물들이 저녁 노을과 어우러지면서 연출된 색다른 이미지는 방금 떠나온 런던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었다.

슈페너가 자신의 일생을 불태웠던 독일 경건주의 요람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슈페너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슈페너가 시무했던 바울교회 외벽에는 그를 기념하는 별로 크지 않은 푸른 청동판이 붙어 있었다. 동판 오른쪽에는 슈페너의 상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경건의 열망’,그리고 가운데는 그의 사역을 집약한 짧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구 첫 마디는 ‘교회와 사회개혁자,프랑크푸르트 루터교 선임목사’였다. 이것은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다른 손에는 사회 개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던 슈페너의 사역을 너무도 잘 집약한 말이다. 비록 그가 이곳에서 사역한 기간은 1666년부터 68년까지 2년밖에 되지 않지만 이 기간에 슈페너는 신앙과 행위,영적 각성과 사회개혁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당시 아무런 삶의 감동을 주지 못하고 냉랭해진 교리주의적 정통주의와 달랐다. 또한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 라우센부시로 대변되는 근대 사회복음과도 차이가 있었다. ‘경건의 열망’이 보여주는 것처럼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생명력은 루터의 비텐베르크 부흥만큼이나 강렬했다. 경건주의 운동이 공동체의 변혁을 태동시킨 이유가 거기 있었다.

1675년 출간된 슈페너의 ‘경건의 열망’에는 종교개혁의 유산,스트라스부르크 대학 시절부터 심취한 요한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와 청교도 사상이 깊숙이 용해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쓴 책이 아니라 불타는 가슴으로 쓴 책이었다. 이 책에는 그의 뜨거운 심장,교회를 사랑하는 충정,개혁과 영적 각성의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녹아 있다. 그는 결코 기성 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지도,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만일 주님 나라도 인격의 서열과 가치를 따라 평가되는 세상 나라와 같다면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마땅히 맨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슈페너는 자신 역시 불완전한 존재로 개혁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향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했으며,그 지식을 얼마나 세상에 발표하였으며,세상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정을 받았으며,그러한 명성을 어떻게 유지시켰고,어떠한 영광 가운데 활동하였으며,얼마나 위대한 이름을 세상에 남겼는가,얼마나 많은 물질의 부를 소유하였는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고 순전한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힘썼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슈페너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에 불을 지폈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서는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등장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때만큼이나 독일 사회에 개혁이 강하게 요구된 적도 드물었다. 경건주의 직전의 독일교회와 사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교회 안에서 시들어가면서 타락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게르버는 이런 탄식을 했다. “사람들은 쾌락과 방종의 길을 걸었다. 농부들은 동물처럼 살았고 부자들은 벤치에 앉아 먹고 마시고 즐겼으며 매일 이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은 일요일에 그 짓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까지 춤과 술에 빠져 있었고 더욱이 논쟁과 주먹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사회에서 교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부패한 사회를 이끌기는커녕 점점 더 세상에 동화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슈페너의 ‘경건의 열망’은 종교개혁의 참된 회복을 외치며 개혁을 향한 거대한 포문을 열어젖혔다. 곧 경건주의 운동은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요원의 불길처럼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곧 독일 전역과 주변 여러 나라에서 개혁과 각성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슈페너로 인해 촉발된 경건주의 영적 각성 운동은 개인의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개혁과 각성을 수반하며 성경 연구,성경대로의 삶의 실천,양로원 고아원 학교 병원 설립을 통해 잠든 영혼을 깨웠다. 1710년 독일에서 성서공회가 조직된 것도,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근대 선교 운동의 출발도 경건주의 운동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자들은 신학교재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신학을 신학자와 성직자의 독점물에서 평신도가 참여할 수 있는 신학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루터가 이룩한 교리개혁은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비로소 종교 영역만 아니라 해외 선교 운동,사회 개혁과 문화 변혁으로 이어졌다.

확실히 영적 각성과 근대 사회 개혁의 성공적인 연계성은 경건주의가 가져다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경건주의 운동이 3세기 동안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은 복음이 단순히 믿는 자의 심령이나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개혁을 수반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회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기독교는 언제나 사회와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경건주의 운동은 한편으로 18∼19세기 영적 각성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구현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과장인지 몰라도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경건주의에 와서 비로소 완성된 셈이다. 경건주의 운동이 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세인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슈페너가 제시한 잠자는 교회를 위한 6가지 원칙

슈페너가 1675년에 기술한 '경건의 열망'은 출판되자마자 교리적 틀에 갇혀 있던 수많은 독일교회와 잠자는 영혼들에 각성의 불을 지폈다. 슈페너는 이 책에서 잠자는 기성교회를 향해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할 것을 촉구했다. 둘째,만인제사장의 회복이다. 셋째,교리나 신조에 대한 지성적 동의가 아닌 사랑의 실천적 행위와 행동으로 현시된 참된 믿음에 대한 강조다. 넷째,연합정신이다. 다섯째,경건훈련이 뒷받침된 신학교육이다. 마지막으로 회개와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다.

얼마 후 '경건의 열망'은 경건주의 운동의 선언서가 되었고 그 불길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9) 프랑케 부흥의 현장

 

프랑케가 일으킨 영적 부흥운동의 현장,독일 작센 지방 할레

17세기 말 프랑케(Auguste Hermann Francke·1663∼1727)를 통해 독일 작센의 한 작은 도시 할레에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과 사회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케는 개인의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할레를 유럽의 대표적인 경건주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목회자와 영혼의 위로자,신학자와 교육자,거대한 조직자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케가 활동했던 작센의 잘레 강변 할레에는 그의 체취가 지금도 가득 남아 있었다. 물론 그 옛날의 화려함과 위용은 찾을 수 없었지만 한 시대의 역사를 주도했던 경건주의 흔적을 도시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할레 시내 모습은 프랑케 시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경건주의 요람 프랑케 재단,오랜 전통의 할레대학,보육원 등이 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할레대학 캠퍼스 건너편에 당당하게 서있는 오페라 하우스,프랑케 시대의 할레 시내 광장이 여전히 그 옛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할레 시내 광장과 그 주변 골목을 정신 없이 걸었다. 수백 년의 역사가 도시 건물 하나하나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혹 프랑케가 남긴 저술과 자료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할레 시내의 가장 오래된 고서점을 찾기도 했다. 서점 직원은 300년이 넘는 프랑케의 책을 들고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배려로 소중한 자료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도보나 차로 할레시내 라니쉐 거리를 따라 할레 마켓 광장에서 프랑케 광장을 향해 남쪽으로 가다보면 화려하게 복구된 프랑케 재단 본부를 만난다. 한눈에 확 들어와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바로 이 건물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케가 1698년과 1700년 사이에 건립한 보육원이다. 프랑케 재단 5층 보육원 건물 지붕 밑 벽면에는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프랑케의 비전을 그대로 집약한 성경 말씀이다. 그 성경 구절 바로 아래 큰 글씨로 ‘프랑케 재단’이라고 쓰여 있는 동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프랑케 재단은 프랑케가 할레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1695년에 세운 자선재단이다. 우리가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 3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그곳에는 할레의 경건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독일 종교개혁의 주역 마르틴 루터가 갓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에 부임한 후 그곳을 부흥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프랑케 역시 1692년 갓 설립된 할레대학 교수로 부임한 뒤 이 대학을 근대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 센터로 만들었다. 그곳 교정에 도착했을 때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대학생들의 모습과 새로 단장한 깨끗한 캠퍼스,활기 찬 모습으로 캠퍼스 교정을 걷는 남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여느 대학 캠퍼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옛날 할레 공동체의 영적 유산이 캠퍼스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비텐베르크 대학과 합쳐져 마르틴 루터 대학으로 명칭이 바뀐 옛 할레대학 캠퍼스를 거닐다 말없이 서있는 프랑케 동상을 발견했다. 나는 그 동상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동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프랑케는 저 멀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달려온 내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섭섭하다거나 아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체류하면서 프랑케는 며칠 동안 계속된 내적 투쟁 이후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꾼 갑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했다. 프랑케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마치 손을 뒤집는 것처럼 그의 모든 의심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단회적인 회심 경험을 통해 프랑케는 하나님의 실존과 중생을 체험했다. 마치 웨슬리의 회심 경험이 감리교 운동을 태동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처럼 그의 회심은 ‘할레 회개운동’을 태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2년후 1689년 1월 프랑케는 드레스덴의 슈페너의 집에서 그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경건주의 이상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었다. 이후 지칠 줄 모르는 30년간의 활약으로 ‘할레경건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 프랑케의 영적 각성은 개인의 각성을 넘어 사회 각성으로 이어졌다. 프랑케가 설립한 빈민자 학교, 보육원,할레대학은 전형적인 사회 개혁의 모델이었다.

할레대학을 통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젊은이들이 복음을 들고 전 세계로 흩어진 것이다. 18세기 동안 할레가 중심이 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는 60명이었다. 1832년 복음의 빚진 자의 심장을 가지고 불타는 가슴을 안고 고대도에 도착하여 최초로 한국 선교를 타진했던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도 할레대학 출신이었다.

비록 귀츨라프는 한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항해기’를 읽고 런던대학에 재학중인 한 젊은이가 동양 선교를 꿈꾸기 시작했다. 바로 그 젊은이가 1866년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한 토머스 선교사였다.

한국 선교가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프랑케의 할레 부흥은 귀츨라프와 토머스 순교를 통해 아시아와 한국 선교로 이어진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0) 진젠도르프는 누구

 

모라비안 부흥의 주역 진젠도르프(1700∼60)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이자 뛰어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700년 5월26일 작센주 한 장관의 아들로 드레스덴에서 출생하여 슈페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외할머니의 밑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의 경건주의는 어린 진젠도르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진젠도르프는 할레에서 교육 받는 동안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했다.

진젠도르프는 전형적인 루터파 경건주의 운동의 후예였지만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피에르 벨의 ‘역사와 비판 사전’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면서도 계몽주의 한계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극복한 인물이었다. 진젠도르프는 이성 중심의 신앙,이성과 더불어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진젠도르프의 십자가의 신학은 당시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지식만의 신앙,계몽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이성 중심의 신앙과 달랐다. 그는 모든 이성적 신인식을 거부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형벌의 고통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곧 십자가 신학이 진젠도르프의 신앙의 근간을 형성했다. 그는 자주 “예수가 없었다면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대속 신앙에 근거한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는 주변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가 이끄는 모라비안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학창 시절의 형제 사랑을 위한 조합들,드레스덴 공직 시절 때 경건을 위한 모임,무엇보다도 헤른후트 형제단은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영토에 정착한 후스의 후예들인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을 통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철저한 경건주의 실천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했다. 이들은 결혼 유무와 성별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체 일원을 ‘대’로 나누고 다시 작은 공동체인 ‘단’과 ‘반’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경건주의을 실천했다. 그 결과 1744년 윌리슨이 증언한 대로 1735년 모라비안 공동체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0)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1727년 이후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모라비안 공동체 가운데 수차례 부흥이 임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근대 부흥운동의 효시였고 근대 선교운동의 주역이었으며 대사회개혁과 사회적 책임의 이상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모라비안이 근대 부흥과 근대 선교운동에 미친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넓은 의미에서 존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은 모라비안 부흥의 산물이었다.

모라비안 공동체가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의 역사 속에서 남긴 뚜렷한 흔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헤른후트를 방문하고 싶었다. 독일에서 처음 맞는 주일,작센지방 헤른후트 모라비안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 출발했다. 헤른후트는 생전 처음 가는 길이지만 근대 교회사에 뚜렷한 영적 각성 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모라비안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헤른후트 마을에 들어서자 외형은 독일의 여느 마을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영적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압도하는 듯했다. 독일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지붕 한쪽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탑이나 종탑도 없었고 교회 건물을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도 찾을 수 없었다. 한눈에 검소함을 읽을 수 있었다.

교회에 들어서자 치장 없는 소박한 예배당 분위기,참석자들의 외모에서부터 화려하고 예전이 짙게 배어 있는 독일 루터교회와 다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찬양대도 없었고 화려한 강단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엄하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회중들이 앉는 의자마저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나무의자였다.

예배는 말씀과 찬양 중심의 아주 심플한 예배였다. 하지만 그 예배가 언어와 인종적 벽을 뛰어넘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가슴으로 외치는 설교,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진지함,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경건함에서 시공과 언어를 넘어 영과 영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목도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독일에 모라비안 교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랐다. 그 혹독했던 동독 공산정권 시절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헤른후트 마을에 사는 1200명 가운데 반 이상이 모라비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주민 절대 다수가 교회를 다니는 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의 한 도시 켈스에서 느꼈던 것처럼 성령이 온 도시를 압도하시는 것 같았다.

예배 후 안내를 받으며 모라비안의 역사가 담긴 박물관,귀한 자료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모라비안 고문서 박물관을 돌아보며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낯선 이국인에게 보여주었던 친절은 특별하고 남달랐다. 주일날 휴관임에도 낯선 방문객을 위해 박물관과 고문서관을 활짝 열고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나를 안내한 튀빙겐대학교를 졸업한 한 여성지도자는 헤른후트 마을 구석구석을 돌면서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헤른후트의 역사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귀찮은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마치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겼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물씬 풍겨났다. 아무런 자료도 없이 유창한 영어로 술술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겸손과 어우러지면서 헤른후트 공동체에 대한 인상은 더욱더 깊은 감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진젠도르프가 첫 사역을 시작한 교회,그가 구축한 성,그가 묻혀 있는 무덤에 이르기까지 나의 관심을 끌지 않은 곳은 없었다. 나는 할레에서 프랑케의 흔적을 피부로 체험했던 그 이상으로 헤른후트에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체취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라비안 부흥은 근대 해외 선교운동에 불을 지폈다. 부흥을 경험하자 이들의 가슴은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진젠도르프는 1732년 레온하르트 도버와 다비드 니츠만을 서인도로 파송했다. 다시 이듬해 크리스티안 다비드를 파송하고 독일 남부와 동·서,스위스,네덜란드,영국,덴마크,발트해 연안의 나라들,러시아,이집트,남아프리카,그린랜드,북미와 서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진젠도르프는 이들 지역을 직접 순회하면서 해외 선교를 독려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18세기에 무려 226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며 근대 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경건의 실천,놀라운 선교열과 사회 개혁을 수반한 모라비안 부흥은 건강한 부흥의 모델이 되었다. 모라비안의 이상은 감리교 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조지아 사바나에서 활동할 때 웨슬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준 것도 모라비안 선교사 스팡겐베르크였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영적 침체에 허덕이는 웨슬리에게 믿음의 필연성을 확신시켜 준 것도 모라비안 피터 뵐러였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영향력은 감리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장인지 몰라도 당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부흥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라비안 부흥은 이성과 자율의 시대로 대변되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차가운 오성에 의하여 풀이 죽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력을 제공했으며 심지어 당대의 사상가 레싱 괴테 헤이더 등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헤른후트의 경건의 열기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독일과 유럽의 교회가 다시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헤른후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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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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