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기독신앙인물탐구

[스크랩] 헤롯왕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9:09

헤롯왕조

 

1. 인적 사항

 


① 헤롯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

② 이두매인으로 헤롯 안티파터 2세(B.C.55-43년)의 둘째 아들.

③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유대의 왕으로 재위(B.C.37-4년).

④ 10명의 아내와 15명의 자녀를 둠. ⑤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계승

 


2. 시대적 배경

 


B.C. 37-4년경, 유대의 분봉 왕으로 통치한 인물. 이 시기는 소위 신구약(B.C.400-A.D. 4년) 중 그 말기에 해당하는 때로는 B.C.63년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말미암아 마카비 왕가의 하스몬 왕조가 무너짐으로써 약 100여년간의 유대 독립 시대가 끝나고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때였다. 헤롯은 처음에 부친 안티파터 2세에 의해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었다. 그러다 헤롯은 후에 다시 로마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심임을 받음으로써 유대 지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그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헤롯이 로마에 대해 보인 과잉 충성은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적개심을 더욱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헤롯 왕가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주요 생애

  

♣헤롯은 일반적으로 평화로운 통치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유대인들의 인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러운 정치를 해 나갔다. 로마와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헤롯은 그 후에도 자신을 후원한 한토니우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호감을 사는 데도 성공했다. 그야말로 헤롯은 정치적인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통치기간 중에 유대의 국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적으로는 헬라화를 시도하였고 위대한 건물들을 건축하였다. 그러한 업적은 어느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보아서 헤롯 당원들이 생겨날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업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각 도시를 모두 새롭게 단장하였고 본래 “스트라토”라는 성채를 재건하여 가이사랴(Caesaria)라고 이름하여 로마의 팔레스틴 수도로 삼았다. 그는 전형적인 헬라 양식의 극장들을 지었다. 지금도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의 유적지 해변에는 헤롯이 만든 극장과 수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헤롯의 정치는 밖으로는 유화적이었으나 가문 내에서나 측근들에게는 매우 잔인한 정치를 했다. 헤롯의 질투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헤롯의 질투성과 의심과 정권욕에 사로잡혀 거의 이성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불안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문제를 제기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사람은 혈통적으로는 이두메(에돔)출신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그 이유는 요한 히르카누스가 B.C. 125년에 이

                                         161

두메(에돔)을 정복하여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하였기 때문이다. 하스몬왕조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한 것이 여러 대가를 치르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결국 하스몬 왕가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헤롯은 자신이 참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취한 행동이 하스몬 왕가의 후손인 마리암네와 결혼으르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의 사람이 대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두려워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스몬 왕조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을 내다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하나넬(Hananiel)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마이암네의 모친 알렉산드라는 내심 심하게 분개하게 되었다. 하스몬가의 사람이 아닌 하나넬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기로 마음에 결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계략을 총 동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마침내 애굽의 여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하여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헤롯에게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할수없이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소환되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하나넬은 해임되고 아리스토불루스가 대제사장으로 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알렉산드라의 정치적 대 승리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헤롯과 알렉산드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정을 되찾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 헤롯은 알렉산드라가 클레오파트라와 연락이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후부터는 헤롯이 알렉산드라를 감시하여 예루살렘 밖으로 나갈 수 없게 감시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라는 예루살렘에 완전히 연금되고 말았다. 헤롯은 사람들을 시켜서 결국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을 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 헤롯은 이 소식을 접하고 꽤나 슬퍼하는 척했다.

 


♣ 헤롯의 말년은 왕위 계승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였다. 헤롯이 이 문제를 풀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왕자들 가운데 3명을 살해하였고 그밖에도 많은 측근들이 죽임을 당했다. 헤롯은 하스몬 왕조의 주요 인물들을 45명이나 처형하였고 그 재산들을 몰수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히르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까지 했지만 마침내 그는 마리암네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까지 처형하였고, 하스몬 왕조의 피가 섞여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없앴다. 뒤늦게 파르티아에서 돌아온 히르카누스도 헤롯의 손에 죽었다. 헤롯은 자기의 죽음을 5일 앞두고 자신의 장자 안티파터를 죽였다. 헤롯은 왕위를 두고 지명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다.

그는 얼마나 자신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자신이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여리고 경기장에서 다수의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경건한 유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두고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려는 그의 계산이었다.

헤롯은 B.C.4년 4월1일 장암과 수종, 동맥경화증 등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헤롯이 죽은 후 헤롯의 가문은 매우 복잡하게 얽힌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헤롯 가문의 불륜과 정치적인 곡예는 로마인들까지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4. 성품

 


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처자식과,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무참히 죽인 것으로 보아 권력 욕이 강하고 잔인하자(마 2:16).

② 로마의 정권 변화에 능수 능란하게 대처하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한 것으로 보아 국제 정세에 밝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

③ 이방인으로서 30년 동안이나 유대를 통치한 것으로 보아 조직력과 지도력을 갖춘 자.

④ 대규모 건축 사업을 왕궁과 요새, 예루살렘 성전 및 이방 신전 등을 건축한 것으로 보아 의욕적인 추진력을 갖춘 자.


5. 구속사적 지위

 


① 베들레헴의 2세 이하 유아를 몰살함으로써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려

                                         162

했던 사단의 하수인(마 2:16).

②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영욕에만 집착하는 자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준 자.

 


6. 주요 공적

 


① 이방인으로서 유대의 왕위에 올라 30년간 통치.

② 거대한 규모의 건축 사업을 통해 문화적 발전 유도.

③ 예루살렘 성전재건 시도. 

  ♣ 헤롯의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 건물은 B.C.20년 경에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에도 건축중이었고 64년 경에야 완성되었으니 84년이나 걸리는 대역사(役事)였다.

헤롯이 시작한 성전공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곳은 45m까지 파고 기초를 놓았을 정도이고, 그 표면의 면적만도 480x300m가 되엇다. 그러나 그 성전은 완성된 지 불과 6년만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헤롯이 짓고 있는 건물의 위용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곧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막13:1-2)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시127:1)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7. 실수

 


①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많은 인명을 살해.

②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2세 이하의 유아를 몰살(마 2:16).

③ 그가 벌인 건축 사업에 이방 신전도 포함한 것으로 보아 우상 숭배를 부추긴 듯함.

 


8. 평가 및 교훈

 


①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온갖 권모와 술수, 또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헤롯 대왕의 영욕에 넘친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슬픈 종말을 증거해 준다. 더욱이 그 역시 끊임없는 음모로 인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는 병으로 심히 앓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갈 6:8).

②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베들레헴 2살 이하된 유아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헤롯의 학살사건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마 2:16). 또한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흉악한 궤계와 미혹을 상징해 준다. 실로 사단은 이토록 무서운 욕망과 집착을 통해 성도에게 도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만 하는 것이다(엡 6:11;벧전5:8).

③ 유아 학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방해하려는 헤롯을 통한 사단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은 계획하신 그대로 면밀히 이행되었다. 이는 사단의 궤계가 아무리 사악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을 증거 한다. 이에 마귀를 대적하고 싸워 이겨야 할 우리 성도들은 이 싸움의 승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담대히 주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겠다(롬 8:35-37).

 


9. 핵심 성구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아켈라오(Archelaus)

 

아켈라오는 헤롯대왕과 말다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헤롯대왕이 그를 첫 번째 상속자로 지명함으로써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으로 피난해 있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유대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 때 유대 땅은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었다.

(마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아켈라오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유대로 가기를 무서워 할때 다시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랄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B.C.4년경 헤롯 대왕이 주고 나서도 A.D.4년 까지 아켈라오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의 비위를 거스리고 또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을 감안하여 로마의 인준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기 전에 아켈라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향한 적개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유월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유월절에 정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A.D. 4년경 아켈라오는 안티파스의 도전을 받았는데, 안티파스는 헤롯대왕의 유언장을 근거로 자기의 왕권을 주장하였고 아켈라오는 수정된 유언장을 가지고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였다. 아켈라오의 어머니 말다케는 아켈라오와 로마로 동행을 했는데, 말다케는 오히려 안티파스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유대의 왕의 계승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팔레스틴에서는 마침내 뢈군이 개입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편 유대로부터 또 다른 대표단이 로마에 도착하여 헤롯 가문의 누구에게도 왕권을 수여하지 말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의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렇게 되자 헤롯 가문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였고 헤롯 빌립이 아켈라오를 지지하기 이하여 로마에 도착했다. 이 모든 소송 사건을 다 들어 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대 땅의 절반을 아켈라오에게 주었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셋 다 왕(King)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분봉왕(Tetrarch)이 라는 명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결국 아켈라오는 로마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까지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통치를 장하면 장차 왕의 칭호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켈라오는 유대로 돌아와 대제사장직에 있던 요에젤을 경질하고 그의 동생 엘르아살을 임명하였다 아켈라오는 글라피라(Glaphira)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려고 자기의 아내 마리암네를 버렸는데 이일이 유대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다. 아켈라오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고발하기 위하여 로마로 대표단을 파송하였고 마침내 로마에 알려지게 되자 A.D.6년에 아켈라오는 갈리아 지방의 비엔나로 추방되고, 총독 코포니우스(Coponius)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다스리게 되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A.D.4-39)

 

헤롯대왕과 그의 사마리아인 아내 말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그의 이름은 신약에서 헤롯왕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막6:1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마14:1, 9⇒14: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14: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그는 자신에게 왕위를 하사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티베리아스를 건설하였다. 지금도 티베리아스는 갈릴리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나바테아의 공주(아레타스의 4세의 딸)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아내로 삼았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부도덕한 헤롯을 바난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공개적으로 질책하였다. 한편 아레타스 왕은 이렇게 자신의 딸을 배신한 헤롯을 응징하기 위하여 항상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 빌립의 아내이며 자신에게는 질녀가 되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헤로디아를 가로채었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이 이 사람을 책망하다가 결국 목메임을 당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헤롯 안티파스의 이야기이다. 그는 양심과 야심이 혼합되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즐기고 또 그녀의 딸을 향하여 음욕을 불태우는 한편, 요한의 용감한 예언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로마까지 가서 자신의 조카이자 제수이기도 한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결국 데리고 온 것이나 그러한  괴물을 따라 나선 헤로디아의 불륜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의 야수 같은 눈길은 이제 제수인 헤로디아에게서 그녀의 딸 살로메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헤롯에게 복수하는 헤로디아의 방법이  곧 새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게 한

                                        166

것이다. 헤롯의 눈에는 세례 요한의 후계자처럼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적지 않은 두려움이 있었던 같다. 한편 호기심이 많아서 예수님께서 무슨 기적을 행하시는가 보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선량한 여자만큼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불량한 여자만큼 표독스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량한 여자는 악한 남자하고 결혼해도 좋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 남편을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선량한 남자는 불량한 여자하고 결혼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의 남편을 충분히 자신과 같은 불량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헤롯 빌립(Herod Philip A.D. 4-34)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아두메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다스리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 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던 것이 밝혀져 있고, 그 밖에 빌립에 대한 기사를 찾기가 어렵다. 그는 A.D.34년에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의 영지는 시리아에 병합되었다가 후에는 아그립바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B.C. 10-A.D. 44)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는 헤로디아와는 친남매간이었다.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 된 후 로마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는 황실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Drusus)와 친구가 되었다. 청년으로 자라면서 그는 방탕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팔레스틴으로 갔지만 거기서 안티파스의 미움을 사서 결국은 다시 로마로 갔다.

A.D.36년 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었다. 곧이어 티베리우스가 죽고 갈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 대하여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다가 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풀려나와 팔레스틴의 빌립이 다스리는 영토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갈리굴라가 미쳐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그 흉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고 하자 아그립바는 이를 단념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 있는 동안 갈리굴라가 죽었다. 아그립바는 그 동안 클라우디어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 중재를  하였다. 이 공로를 클라우디어스가 인정하여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도 아그립바에게 일임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였고 (행12:1-2⇒“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했으며(행12:4-5⇒“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는 유대인의 비위를 맞추는데는 아주 명수였다. 그리하여 그런대로 정치적인 곡예를 잘 하다가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가 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치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있다가 결

                                         167

국은 충이 먹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행12:20-23⇒“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Ⅱ, A.D.27-100)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불과 17세였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해서 유대의 관할 구역은 총독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A.D.50년경에 팔레스틴 북부 칼키스(Chalcis=지금의 레바논 지역) 지방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53년에는 클라우디어스가 빌립이 다스리던 땅과 교환하여 주었고, 클라우디어스가 죽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티베리아스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더 붙여 주어 상당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누나를 범하여 근친상간을 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베스도와 함께 바울의 증언을 듣가다 베스도가 바울을 향하여 미쳤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행26:24-32⇒“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26: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26: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26: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그 후에 예루살렘에 있던 하스모니아 왕궁을 확장하였다. 또 가이사랴에서 건축 사업을 추진하였다. 66년 제 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그는 로마로 가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거기서 장수하다가 약100년 경에 죽었다. 그는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