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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약도의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9:12

 

언약도의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

 

서창원 목사

 

사무엘 루터포드는 제드버러(Jedburgh)노회에 속한 크라일링(Crailing)교회가 있는 니스벳(Nisbet)에서 1600년에 태어났다. 그는 스코틀란드 저지대의 한 부요한 농장에서 두 형제와 함께 자랐다. 그의 부친은 큰 지주는 아니었을지라도 루터포드는 편안한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옛 사원에 자리 잡고 있는 학교에 다니며보내었다. 그러나 1617년까지는 그의 어린 시절이 그리 많이 알려진 바는 없다. 17세 되던 해에 루터포드는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현대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1621년 M.A.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1636년에 쓴 편지에 의하면 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열망하였다. 아마도 이 때 그가 회심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루터포드는 1623년에 대학 학생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아울러 목회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이 직책은 1597년부터 라틴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학생들과 교수사이의 중재를 해주는 직분이었는데 이것이 대학에서 Regent of Humanity로 알려진 것이다. 시의회는 당시 대학에 있는 4명의 철학담당학생감중 이 직분이 가장 낮은 것임을 분명히 하였으나 이 직분은 최고직을 선출하는데 선거권을 수여하여 주었다. 따라서 이 직분도 경쟁이 심하였는데 4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루터포드가 임명된 것이었다. 그의 라틴어 실력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탁월한 능력과 고귀한 진술등'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6년2월 3일 시의회는 그의 부도덕한 행위로 인하여 그를 그 자리에서 사임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학문의 길에서 벗어나 목회사역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사건을 매우 비통하게 생각하였으나 대학당국의 규정에 어긋난 결혼을 감행하므로 일어난 것이었다. 이것은 루터포드를 몰아내고 감독주의자를 기용하려는 자들의 음모였다고 알려 진다.

 

이 이후 몇년동안 그의 생활은 들어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이 기간이 큰 유익을 준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련기에 그의 전 생애를 주관한 친구들과 인격적인 깊은 만남이 있었다는 것이요, 스코틀란드에 감독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땀 흘린 블레어와 딕슨 및 리빙스톤 목사들을 알게된 것이었다. 따라서 시련들은 학문연구와 아울러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한 그의 뛰어난 영적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복음 전하는 목사가 되게 만들었다. 드디어 1627년 루터포드는 목사안수를 받고 곧 안워쓰(Anworth)라는 작은 시골교회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안워쓰는 1595년부터 1600년까지 존 낙스의 사위인 존 웰쉬(John Welsh,1570-1622)목사가 안워쓰 근처인 컥크쿠드브라이트(Kirkcudbright)에서 목회하면서 복음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그리 낯설은 곳이 아니었다. 존 웰쉬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사도적인 열정으로 복음을 심기 위하여 수고와 노력을 다한 자였었다. 그 당시 로버트 부루스(Robert Bruce,1554-1631)목사와 웰쉬목사는 스코틀란드에서 가장 능력 있는 유명한 설교가들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존 리빙스톤(1603-1672)목사를 청빙하였었는데 그는 다른 곳으로 부름받아 가게 되어 루터포드목사가 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 리빙스톤은 안워쓰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합당한 종, 사무엘 루터포드목사를 주께서 준비하여 주셨다'고 기록하였다. 사람들은 존 웰쉬 목사의 겉옷이 루터포드의 어깨 위에 얹혀졌으며, 그의 영의 갑절의 은혜가 새로운 목회자 위에 임하였다고 보았다.

 

안워쓰는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으나 종교개혁 신앙과 교리들을 굳게 붙든 곳이었다. 루터포드목사는 안워쓰 교회에 와서 그의 목회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온 종일 그는 연구와 기도, 설교, 가르침, 및 심방으로 일관하였고 잠은 오직 6시간만 잘 뿐이었다. 장로회주의자로 장로교 사상을 심으며, 무엇보다도 복음을 증거한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목회사역은 그의 수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안워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자들 중에는 경건한 성도가 꽤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매 격주마다 한번의 설교를 들을 수 밖에 없는 말씀에 굶주린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만찬에 매일 앉아있는 한 종의 손에 의하여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 먹습니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고 있든지 아니면 설교하든지 또는 독서와 글을 쓰고 있었다고 사람들은 증거하였다. 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변함없이 밤낮으로 일을 하였다. 한 밤중에 사람들이 그의 사택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그의 서재로 부터 흘러나오는 촛불 빛을 볼 수 있었다. 루터포드목사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언제나 주의 얼굴을 구하며 목회사역의 힘인 주의 말씀의 맛을 보기를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는 호랑가시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왔다 갔다 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사택을 가리고 있는 나무들 밑에서 늘 그의 영혼을 토로하는 기도를 하곤 했다. 이것이 강단사역을 위하여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으로써 주를 기다리기를 사랑한 그의 비밀이었다. 존 리빙스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루터포드목사가 안워쓰에 있는 동안 그는 가련하고 무지한 백성들 가운데 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기독교 신앙의 실천으로 이끈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그의 사역은 갈로웨이(Galloway) 전 지역의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전 지역이 그 앎에 존재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특별한 양들이라고 간주하였다. 특히 성찬주간(전통적으로 장로교의 성찬예식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는 보통 2주간씩 계속되었다) 동안에는 인근 각처에서 신도들이 물려들었고, 그의 설교는 그를 아끼는 한 성도에 의해서 속기로 기록되어 남게 되었다. 그의 교회는 남부 스코틀란드 지역의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9년동안 안워쓰에서 목회하면서 즐거움과 슬픔도 함께 맛보았다. 1630년에 그의 아내인 유팜(Eupham)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고 1635년에는 그동안 함께 기거하였던 모친도 하나님 품에 안기었다. 결혼생활에서 얻은 두 자녀조차도 사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640년 두번째 결혼을 한다. 이 결혼에서도 자녀를 낳았지만 그가 런던에 있을 때 숨을 거두웠고, 그 이후 5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루터포드가 죽었을 때는 오지 한명의 자녀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어머니(Jean McMath) 곁에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자신도 3일마다 한번씩 몸살을 알았던 것 때문에 3개월 동안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만 설교하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이슬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 은총에 광채를 더하였고, 그에게 그의 성도들의 심령을 꽤뚫는 풍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1631년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위대한 포도원지기이신 주님께서 그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그의 손으로 친히 나를 이곳에 심으셨습니다. 나는 이 포도원의 위대한 주인께서 나를 다른 곳에 옳겨 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시기까지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그는 그의 양무리들을 위하여 천사와 씨름하였고 그의 양들을 축복하여 주시기까지 주님을 놓지 않았다. 그는 숲속의 나무들과 언덕의 풀들이 그가 그의 양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안워쓰 사이에 참으로 멋있는 다리를 연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는 증인으로 불러 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일찍 일어남, 지칠줄 모르는 연구, 끊임없는 수고, 그의 밤이 맞도록하는 기도생활등은 이같은 목회목적을 위한 것들이었다. 밤낮으로 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은 그의 양들의 필요에 대한 것들이었다. 때로 양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루터포드는 그의 첫 설교를 요9:39을 본문으로 삼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설교자로서 그의 열망은 보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며 그의 나라에 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몰려왔다. 그 중에 마리온 맥노트(Marion McNaught)라는 행실이 선하고 자애로운 귀부인이 왜 자기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멀리서 오는 지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종종 안워쓰에 오는 것은 비록 다른 목사들도 나에게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나의 심령에 있는 재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만 사무엘목사님은 이 모든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목회자가 내게 보여주지 못한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The loveliness of Christ)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를 읽어보면 언제나 왕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풍성하게 타오르고 있는 듯하며 순수하고 정열적인 깊은 찬양이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안워쓰에서 하루를 보낼 때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루터포드목사는 양들을 사랑하는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행동가였으며, 당시 스코틀란드에 불어닥친 국가와 교회와의 갈등(필자가 90년과91년 여름호 '개혁신앙' 잡지에 쓴 언약도 운동사를 참고 바람)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이었다. 그의 장로회주의에 대한 확신은 감독제도를 배격하였고 이것은 결국 왕의 지지를 받고 스코틀란드에 감독교회를 세우려는 성공회주의자들과의 충돌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칙령에 의하여 교회당에서 모이지 못한 언약도들은 옥외집회를 감행하였는데 이 때 루터포드목사는 남부 스코틀란드의 주된 옥외집회 설교자로 나섰다. 결국 그는 1634년 찰스1세가 새로히 임명한 갈로웨이 감독인 시드세르프(Sydserf)와 충돌하였다. 그는 감독제도를 부정하는 반역적인 설교를 했다고 해서 소환되었고, 장로회주의 사상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목사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에딘버러로 후송되어 법정에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에딘버러 법정에서 그는 알미니안주의를 배격하는 그의 <하나님의 은총을 변호하는 변증론> 이라는 책 때문에 죄목이 더 추가되었다. 이 책자는 라우드 켄터베리 대주교의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크게 공격한 책이었다. 그는 스코틀란드 어디에서도 설교를 할 수 없도록 금지당하였고 아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때가 1636년7월이었다. 8월 20일 아버딘으로 향하여 떠날 때 그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선한 싸움에 참여할 수 있음에 대하여 크게 기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옥중서신(사실 루터포드는 아버딘 감옥에서 쓴 그의 서신으로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다)에서 켄뮤어(Kenmure)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그 때는 내가 16년 동안 나의 주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기도해온 그 순간이었고, 나의 친절하신주님께서 내게 지금 나의 왕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받도록 수여해주신 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포드목사는 아버딘 감옥을 '그리스도의 왕궁'으로 묘사하면서 주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천국임을 입증하였고, '혹독한 겨울철에 하나님의 은혜의 꽃이 활짝핌을' 증거하여 진리때문에 고난받는 성도들을 크게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의 목회사역과 가르침은 장로회주의를 굳게 심었으며 진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또 그는 스코틀란드에 장차 한 세기동안에 일어날 정치적인 일들과 교회적인 일들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교회지도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을 경계하여 깨어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1638년 2월 28일은 스코틀란드에서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른바 <국가 언약>을 맺는 일이 일어나면서 감독주의를 몰아내고 존 낙스때부터 개혁되어온 장로회주의를 확고히 심으려는 언약도들이 탄생된 때이다. 또한 루터포드의 감옥생활이 풀어진 날이기도 하였다. 아버딘에서 그가 쓴 마지막 편지가 6월 11일자 이었고 그 다음 편지가 안워쓰에서 쓴 것인데 날자는 8월 5일이었다. 그가 꿈에도 그리며 사모하였던 안워쓰 성도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루터포드목사는 6월 말에 에딘버러 대학교회와 글라스고의 하이쳐치에서 설교하였다. 그리고 곧장 안워쓰로 돌아갔다. 그의 돌아옴을 반겨줄 아내도, 자식도, 어머니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의 양무리들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의 황흘한 재회는 잠시뿐이었다. 그의 포도원주인이 그를 신선한 토양으로 옮겨 심었기 때문이었다. 1638년 이른바 제 2의 종교개혁이라 불리우는 글라스고 총회 총대로 부름을 받고 여전히 그를 감시의 눈초리로 보는 감독주의자들과 맞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싸워야만 하였다. 총회는 알렉산더 핸더슨을 루카스로 부터 에딘버러로 가라고 요청한 것처럼 루터포드목사도 안웨쓰에서 성 안드류 대학 교수로 가라고 요청하였다. 총회는 루터포드의 견고한 학식이 최고로 필요로 하는 곳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옮겨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설교사역을 하지 못한다는 짓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총회가 나를 목회지에서 옮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누가 나와 저주 사이를 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결국 그가 총회의 강요에 못이겨 안워쓰를 떠나면서 그의 심경을 표현한 편지를 보면 이때처럼 죽고 싶은 때가 없는 큰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성 안드류 대학의 성 마리아 대학 신학교수로 옮겨온 그는 그곳에서도 그의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였다. 그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게 교회를 바르게 이끄는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고 그의 손길은 스코틀란드에서 그리스도의 왕관을 그리스도의 이마에 바로 씌우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성 안드류는 스코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가장 탁월한 학자들이 가르친 곳이었다. 지난 60년 동안 한 명의 학장과 4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1580년부터 1607년 감옥에 가기 까지 학장으로 수고한 안드류 멜빌과 루터포드가 교수로 왔을 때도 재직 중인 로버트 하웨(RobertHowie)교수, 로버트 블레어, 그리고 루터포드 목사가 그들이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참석하기까지 루터포드는 주로 교수사역에 충실하였다. 하웨교수는 루터포드목사가 성 안드류에 온 이후성 안드류 대학이 스코틀란드 전역에 걸쳐서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기위하여 백향목을 가져온 레바논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루터포드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핸더슨목사, 베일리목사, 길레스피목사 등과 함께 스코틀란드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곳에서의 그의 일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토론과 논쟁속에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핸더슨과 길레스피와 함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논리로 장로교 사상을 전개하여 갔다. 시온의 허물어진 성을 재건축하는 일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회생하였다. 그는 1644년경에 그의 유명한 책인 Lex Rex를 썼다. 이 책은 왕과 백성들 사이의 투쟁을 자아냈다. 당시 가장 뜨거운 문제인 왕과 법문제를 다루었다. 왕은 법위에 군림한다는 사상을 정면으로 대치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언약도들의 정치원리와 정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 책이었다. 왕권은 백성들에 의해서만 수여되는 것이요 백성들이 원치 않을 때에는 왕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은 국가의 가장 높은 종이며 언제나 섬기는 종임을 잊어서는 않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절대 권력이란 불합리하고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군주의 의지가 절대로 옳고 그름의 규범이 되어서는 안되며, 나라는 오직 법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신수설과 절대군주론을 굳게 붙든 왕으로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배포된 책은 모두 다 수거하여 불에 태워졌다. 이같은 발언은 존 로크가민주주의 정신을 이야기하기 50년 전에 한 장로교 목사에 의해서 가르쳐졌으며 존 낙스 이후로 스코틀란드 국민 정서이기도 하였다.

 

루터포드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최후까지 남은 스코티쉬 대표였다. 1647년 11월에 런던을 떠나 스코틀란드로 돌아온 그는 성 마리아 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1651년에는 성 안드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가르침과 설교의 사역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일이었으며, 그 어떤 것도 그를 그 사역으로 부터, 그리고 고향을 벗어나게 하지 못하였다. 화란에서 그를 두번씩이나 청빙하였지만 거절하였고, 끝까지 언약도 정신에 충실히 스코틀란드 교회를 지켜 나갔다. 왕 문제로 언약도들 사이에 분열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성경적인 정신에 신실히 움직였다. 그의 불관용 정신을 비난하였던 딕슨목사 역시 죽으면서 남긴 말은 루터포드목사와 항거자들이 참된 선지자들이었다고 하였다. 루터포드는 그의 모든 생애를 그리스도의 왕관과 언약의 땅을 위하여 투쟁하며 토양을 기경하였다. 그의 교회가 '달빛처럼 아름답고 태양처럼 맑고 기치를 펄럭이는 군대처럼 엄위한'(아가서6:10)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온갖 정열을 다 기울였다.

 

루터포드의 생애는 1660년 5월에 찰스2세가 왕위에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마감되어진다. 찰스의 추방령으로 인하여 수많은 청교도들이 목회지에서 쫓겨났으며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언약도들 역시 순교의 제물이 될 지경에 처한 상황에서 Lex Rex를 쓴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당국은 1660년 9월에 반역적인 문서로 규정하고 왕의 신하로서 그 책을 읽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책은 10월16일 수거되어 소각되었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왕과 제국의 평화를 깨트리는 원수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후 루터포드목사도 소환장을 받았는데 그의 질병과 연약한 육체로 인하여 연기하여 줄 것을 대학당국이 청원하였다. 따라서 그의 출석없이 법정에서 그의 죄목이 처리되었는데 목사직에서 쫓겨났으며 대학 총장의 자리에서도 해임되었다. 그리고 가택연금을 당하였고, 마지막으로 의회의 인준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소위 술주정 의회라 불리우는 의회가 1661년 신년에 개회되었다. 이 의회는 왕권을 보다 더 강화시키는 법령을 제정하고 그 동안 맺은 언약문서들을 폐지하였으며 언약도들의 지도적인 인물들인 아어가일, 와리스톤, 거쓰리 및 루터포드목사의 처리문제를 다루었다. 이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하도록 확정되었다. 루터포드목사는 그를 데리러 온 군사들에게 병상에 누워서 '먼저 하늘의 부름이 있으니 왕의 소환에 응할 수 없으며 하늘의 부름에 순종해야 한다. 나는 몇 안되는 군주들과 위대한 양무리들만 올 수 있는 곳으로 가노라'고 말하고 곧 숨을 거두웠다. 따라서 그는 교수형은 당하지 않았다. 그는 '교수형으로 죽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더 영광스러운 길이지만 주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친구의 말에 '나는 살아서 그를 찬양할 것이다. 나의 구속자에게 영원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1661년 3월 29일 아침에 그는 그리스도의 품으로 갔다. 그의 영혼이 안식하고 있는 베개는 그의 모든 꿈과 소망을 감동시킨 옛 약속의 말씀이었다: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에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사33:17).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믿음의 확실한 비젼으로 바꿀 수 있는 지를 알았던 자였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땅에 거하는 영광을 찬미한 위대한 언약도의 성자는 진리와 시민의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광과 자기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살다가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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