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기독신앙인물탐구

[스크랩] 오리겐의 순교에의 열망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9:11

오리겐의 순교에의 열망

 

오리겐(185-254)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Leonidas)의 기독교교육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세심한 것이었다. 오리겐이 17세때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박해를 일으켰다. 이때에 아버지가 투옥되어 순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오리겐은 아버지에게 배교하여 출옥하지 말고 순교의 길을 당당히 가라고 권면의 편지를 쓸 정도로 그가 받은 교육은 철저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오리겐의 편지는 "천국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오리겐 자신도 아버지처럼 순교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오리겐이 너무나 어린 나이에 순교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꼭 순교하는 것 만이 참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만류하였다. 어머니는 오리겐을 발가벗겨 방에 가두고 그의 옷을 숨겨버림으로서 순교를 막았다.

오리겐은 아버지가 죽자 박해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를 계승하여 203년에 18세의 나이로 교리학교 교장이 되어 어머니를 도와 여섯명의 동생들을 돌보았다.

클레멘트는 관대하고 지적인 신앙을 가졌던데 반해 오리겐은 열정적이고 엄격하였다. 오리겐은 학교를 재정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 자기의 재원이었던 도서관을 약 12센트에 팔기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교사 초기시절에 그는 이방인 알렉산드리아인 학생들에게 성적 스캔달 없이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알렉드리아 교회로 하여금 남녀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런 행동은 3세기 로마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다.

오리겐은 철저히 금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루종일 가르쳤고 밤에는 성서를 연구하는 일로 지샜고, 수면은 최소한으로 취했다. 오리겐은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중요한 책으로는 "헥사플라", 각종 성경주석들, "제1원리"(De Principiis:이 책은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단 셀수스를 반박하여" 등이 있다.

여섯개의 언어로 된 구약성서를 모아 각 구절을 대조한 유명한 [헥사플라](Hexapla)는 오리겐의 대표적인 성서 연구물로서 최초의 본문비평자료라고 할 수 있다. 헥사플라는 6500 페이지, 50 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하는 분량으로 약 250년 경에 완성되었다. 초기 교부들이 인용한 신약성경 구절의 50 %가 오리겐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헥사플라는 히브리어 본문(현존하는 후기 마소라 본문과 실질상 동일한 것),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 아크빌라(Aquila, 95-137년: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감)의 그리스어 번역본, 에비온파였던 심마쿠스(Symmachus)(160-211년)의 그리스어 번역본, 통상 70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되는 오리겐 자신의 작품, 에비온파 데오도티온(Theodotion)(160-211년)이 만든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헥사플라는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분실 또는 파괴될 때까지(638년)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었고, 통상 70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되는 오리겐 자신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모두 잔존하며, 바티칸 사본(B) 필사본, 시내 사본(K), 알렉산드리아 사본(A), Ephraemi Rescriptus(C)에서 발견된다.

오리겐의 글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성서해석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성서해석 방법은 철저히 알레고리적(풍유, 은유적)이었고 항상 현상적(physical) 해석을 너머 영적 해석에 더 가치를 두었다. 실제로 그는 주기도문을 읽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부분을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읽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성서의 각 문장들을 다룰 때 문자적(육체적), 도덕적(적용), 풍유 혹은 비유적(영적)인 삼단계를 거쳐 해석했다. 이런 풍유적 해석 방법은 그의 성서해석에 부지불식간에 헬라철학의 방법론을 조화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오리겐은 감독에 의한 죄의 용서 즉 감독의 사죄권을 말하기도 했으며, 세례를 중요한 구원의 표지로 생각했는데,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리겐의 후기는 정통 신앙에서 비껴나 있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고, 영혼이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으며(영혼 선재설), 별들과 행성들도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다. 그는 또한 사악한 자도 형벌을 받은(연옥에서의) 후에는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는데 심지어는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리겐은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이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던 반면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오리겐은 그토록 순교를 열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데키우스 박해 때에 투옥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54년에 병사하였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