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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칼럼] 2009년 최열, 2020년 윤미향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21. 06:13

[박찬수 칼럼] 2009년 최열, 2020년 윤미향

등록 :2020-05-20 14:00수정 :2020-05-21 02:06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자의 ‘후원금 회계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비가 내린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우비가 입혀져 있다. 연합뉴스

 

11년 전인 2009년 4월, 최열 환경재단 대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환경운동연합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검찰이 최 대표를 불구속 기소한 직후였다. 빼돌린 돈을 딸의 유학 비용으로 썼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그에게 검찰 발표가 사실인지 물었다. 답변은 이랬다. “초기 환경운동연합 건물을 조성하면서 자금이 모자라 내 돈을 환경련에 빌려줬다가 나중에 기부금에서 돌려받았다. 시민단체는 수시로 돈이 부족하니 그렇게 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1990년대 시민운동을 시작할 때엔, 운동을 잘하는 게 중요했지 돈 문제는 소홀히 했다. 그건 우리가 잘못한 거다. 앞으로 고쳐야 한다. 다만, 지금의 (회계) 잣대로 열악한 시절의 시민운동을 평가하진 말아달라.”

 

한국에서 환경운동이 이만큼 뿌리내린 게 최열 대표의 헌신적 노력 덕분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는 환경 문제에 맞서려 ‘항상 지방을 돌아다녔기에 돈 문제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런 그에게 법원은 횡령 혐의 ‘무죄’를 선고했다. “개인적으로 취한 이득이 없고 시민단체의 주먹구구식 회계 처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판결 이유였다. 다만, 돈을 받고 건설업체 대표의 민원 해결을 주선해준 혐의(알선 수재)는 유죄로 인정했다. 알선 수재 혐의는 1심에서 무죄였다가 2심에서 유죄로 뒤바뀐 경우였다.

 

나중에 박지원 당시 민주당 의원은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추가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1심 무죄가 2심 유죄로 뒤바뀐 게 말이 되는가”라고 비판했다. ‘시민운동 대부가 후원금을 빼돌렸다’는 검찰 언론플레이에 비하면, ‘태산명동에 서일필’ 격이었다.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그 시절 마주했던 당혹스러운 표정의 최열 대표를 떠올린다. 열악한 시민운동 환경과 활동가들의 헌신, 그 과정에서 지나쳐버리는 회계 규정, 시민운동을 싸잡아 매도하는 보수 언론의 정치 공세와 ‘그래도 대의를 훼손하진 말라’는 항변까지…, 우리 시민운동이 처한 힘겨운 현실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안타까운 건, 10여년 전 허술한 회계 처리로 혹독한 고초를 치른 최열 대표의 소중한 교훈을 지금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때 <한겨레>에 실린 최열 대표 인터뷰 제목은 “시민단체, 운동만 앞세워 돈 문제 소홀했다”였다. 최 대표가 탄식했던 이 부분이, 2020년에도 해소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상황이 이런 데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다.

 

최열 대표는 “대다수 시민단체가 유능한 회계 전문가를 채용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육성을 위한 공적 지원에 인색한 정부의 책임이 있고, 시민단체 활동은 ‘봉사’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고 보는 사회의 책임도 있다. 특히 최열 대표가 울린 경종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못한 시민단체는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정의기억연대의 11일 기자회견을 보면서,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놀라운 변화를 했는데도 왜 시민단체는 헌신성에 걸맞은 투명성을 갖추지 못한 걸까 묻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시대는 변했고, 누군가는 그 변화에 걸맞은 책임을 보여줘야 한다.

 

윤미향 전 이사장 논란이 이렇게까지 증폭된 데엔, 그가 집권여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자청한 계기도 윤 전 이사장의 비례대표 진출인 걸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윤 전 이사장은 “국회 의정활동으로 평가받겠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을 정부여당뿐 아니라 진보 진영 전체의 위선과 부도덕성 문제로 몰아가는 도 넘은 정치 공세를 생각하면,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2013년 옥중에 있던 최열 대표는 세계적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이 주는 ‘치코멘데스상’을 받았다. 정치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시민운동을 지켰다는 공로였다. 지금 중요한 건 큰 상처를 받은 위안부 인권운동을 다시 추슬러 앞으로 나가는 일이다. 더불어시민당이 윤 전 이사장을 비례대표로 뽑은 건 30년에 걸친 개인의 열정과 노력도 크지만, 정의기억연대로 대표되는 위안부 인권운동의 빛나는 업적을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의에 비춰보면,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어떤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지켜야 할 자리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무엇이 진정 책임있는 자세인지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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