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두 기자 석방 위해 평양행…북은 ‘빌 클린턴 특사’ 고집했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24. 01:49

“두 기자 석방 위해 평양행…북은 ‘빌 클린턴 특사’ 고집했다”

등록 :2020-06-22 17:12수정 :2020-06-23 10:47

 

2009년 3월17일 미 케이블방송 기자
한국계 유나 리·중국계 로라 링
두만강 북중접경지역 취재중 체포

사안 심각 판단 ‘평화 중재자’ 자임
3월24일 방북해 고위 인사들과 면담
“실정법 위반 명백해 재판 불가피”
4월 재판 시작 6월 ‘12년 노동교화형’

7월4일 2차 방북 5일간 마라톤협상
북 ‘인정·사과·사면’ 3A 조건 제시
“특히 ‘유감’ 아닌 ‘사과’ 단어 요구”

특사 ‘앨 고어’ 추천하자 “오면 체포”
2000년 방북 무산 클린턴 전 대통령 지목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사과하면…”

8월4일 ‘클린턴 평양행’ 속보 나오자
휴가지로 중계차 몰려와 ‘긴급 인터뷰’

8월5일 클린턴과 두 기자 무사히 귀국

길을 찾아서-33회 미국 기자 ‘석방’ 중재하다

2009년 3월17일 미국 케이블방송 <커런트 티브이> 기자 2명이 북-중 접경지역에서 취재 중 두만강을 넘어 불법 월경 혐의로 북한에 체포당한 사건이 터지자 박한식 교수는 ‘평화의 중재자’로 나서 두 차례 방북을 통해 석방 협상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그해 6월8일 북한 당국이 유나 리(사진 왼쪽), 로라 링(오른쪽) 두 여성 기자에게 ‘12년 노동교화형’을 내렸다는 속보는 국내외 큰 주목을 받았다. 사진 와이티엔 화면갈무리

 

2009년 3월 17일 미국의 케이블 방송 <커런트 티브이>(current.tv) 소속의 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가 북한 당국에 체포됐다. 그들은 두만강 부근 북중 접경 지역에서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던 중 느닷없이 나타난 북한군 초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범법 행위도 없었고 정당한 취재 활동을 하고 있던 중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조사와 발표는 달랐다. 두 기자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 국경을 침범해 들어왔고 북한군 시설과 초소, 그리고 초병들의 움직임까지 촬영한 정황이 포착되어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들을 체포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같이 있던 카메라 기자가 체포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가지고 중국 쪽으로 도주했는데 북한의 국가 안보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는 민감한 군사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국경 침입죄와 반국가 간첩 행위라는 무거운 혐의가 있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에 의거해 조사와 재판이 진행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어 6월 8일 두 기자는 ‘조선민족적대죄’와 ‘비법국경출입죄’ 명목으로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죄를 저지르고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미국 국적의 두 기자가 북한에서 12년의 수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갓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고 북한 또한 오바마 정부에 대해 대북 정책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던 터라, 이 사안이 북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돌발 변수가 되어서는 안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북미 관계의 악화는 한반도 평화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북한과 미국을 잘 알고, 두 나라 모두의 행동 양식을 이해하고 있는 만큼, 나는 특히 ‘평화 중재자’로서 두 기자의 석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두 기자가 북한에 구금되어 있던 140여일은 내게도 긴장되고 숨가쁜 시간이었다. 어느새 11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박한식 교수는 2009년 3월 두 미국 기자의 체포 소식을 듣는 순간 사안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평화 중재자’로 나서 두 차례 방북해 석방 협상을 주선했다. 사진은 2009년 7월 10일 미국 시민단체들이 유나 리와 로라 링 기자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나는 그해 3월과 7월, 두 번 미국과 북한을 오가며 그들의 석방을 위해 북미간의 중재에 안간힘을 썼다. 북한 고위 관리들과 면담하면서 석방을 위한 협상안을 마련했고 그 협상안을 미국 쪽에 전달했다. 두 기자의 가족은 물론 미 국무부와 정보부 관리들과도 수시로 접촉하면서 그들의 근황을 전하고 석방 협상에 대한 조언도 내내 해줬다. 북미간 대화를 촉진하고,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체포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사안이 심각하고 분초를 다투는 일이라는 생각에 바로 길을 나서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 지금껏 50여 차례 다녀왔지만 북한 방문은 매번 쉽지가 않았다. 우선 북한 당국의 초청장을 받아야 하고,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에 초청장을 제시해 비자를 받아야 비로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수 있다. 미국 애틀란타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항공 노선을 주로 이용했는데, 항공편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날짜를 잘못 맞추면 베이징에서 하루이틀 허비하기도 다반사였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 여정에 미화 1만 달러는 족히 들었는데 미국 대학교수의 월급은 사실 박봉이다. 또한 자주 다니다 보니 이리저리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소박한 선물도 가끔 챙겨가곤 했다.2009년 3월 24일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선 두 기자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으며 그들의 신변과 안전에는 별 이상이 없는지를 파악하고자 동분서주했다. 평양 모처에서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우를 잘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북한 당국자들과 만났다.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보까지도 가능한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여기서 한 명 한 명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주로 통일전선부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 직책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2009년 3월과 7월 두 차례 방북한 박한식(왼쪽) 교수는 리종혁(오른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등 평소 친분을 쌓아온 북쪽 간부들과 만나 두 기자의 ‘석방 조건’을 타진했다. 박 교수가 2009년 10월 미 조지아대학에서 주최한 ‘트랙2’ 세미나 때 북쪽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한 리 부위원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박한식 교수 제공

 

저녁 식사를 겸해서 이루어진 만남은 내가 선물로 가져간 꼬냑이 한 순배 돌면서 딱딱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사람 사는 얘기도 했고 북미 그리고 남북 관계 현안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중간중간 친근한 농담도 오갔다. 허물없이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술 한 잔이 필수적인 건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두 기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북한 인사들도 내가 당연히 그 얘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북한 당국이 두 기자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조금씩 명백히 보였다.내가 받은 느낌은, 북한 당국이 두 기자를 북한에 오래 붙들어 놓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북한의 체면이 서는 모양새로 석방시켜 줄 것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2009년 3월의 북미관계와 미국내 정치 상황을 보면 북한의 이런 속내는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 행정부가 퇴임하고 오바마 정부가 취임한 지 불과 두 달정도 되었던 시점이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던 북한으로서는 젊고 신선하며 진취적으로 보였던 오바바 행정부에게 ‘올리브 가지’를 내밀고 싶었던 것이었다. 두 기자 석방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이 원하는대로 당장 석방은 힘들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실정법을 위반했고, 현장에서 체포된 두 기자를 조사와 재판 없이 석방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즉 북한 당국의 조사가 마무리되고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그 뒤에 외국인 추방형식으로 석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두 기자의 가족과 미국 정부에 그들이 구치소나 감옥이 아닌 초대소에서 잘 대우 받으면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기전 까지는 석방이 어려우니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하였다. 그러던 중 4월 하순 북한이 두 기자에 대한 정식 재판을 시작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인 6월 8일 북한 중앙재판소는 두 기자에 대해 통상 북한의 국경을 넘어 침투하여 적대적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조선민족적대죄과 비법국경출입죄의 죄목으로 각각 12년의 노동교화형 선고했다. 선고 직후 미국 정부와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대로였다. 북한의 유죄 판결은 근거없는 것이며 두 기자를 조건없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즉시 석방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나는 사안의 심각성과 미국 정부의 태도를 볼 때 두 기자의 석방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7월 4일 다시 한번 방북해 본격적으로 석방을 위한 교섭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앞서 3월 방문 때 면담했던 북한 고위 관료들과 다시 만나 5일 동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두 기자의 신병처리에 관해 북한 당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시도했고 그들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고 명확했다. 미국 정부가, 두 기자가 북한의 국경을 불법적으로 침범하였고 북한에 적대적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Admit), 공식 사과(Apology)한 다음, 사면(Amnesty)을 부탁하면 기자들이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위 `3에이(A)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 고위 인사들은 위에서 말한 영어 단어 3개를 직접 지목하며 나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어폴러지’에 방점을 찍어 강조했다. 즉 미 정부에서 ‘유감’(Regret)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어폴러지’로 표현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처럼 때로는 협상 과정에서 단어 하나 하나가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북한에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을 석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고 지도자의 사면밖에는 없으니 미 정부가 정중히 사면을 청하면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2009년 8월4일 지미 카터에 이어 전 미국 대통령으로는 두번째로 북한을 방문한 빌 클린턴 특사가 평양 순안공항에서 화동에게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사면과 관련한 또 하나의 조건은 미국 쪽에서 격과 급이 맞는 인사가 북한에 와서 직접 김정일 위원장에게 사면을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잘못을 했을 때 부모가 학교에 가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과 흡사한 발상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특사로 와야 격과 체급이 맞는단 말인가? 북한 관리들은 어떤 인사가 적합한지 내게 조언을 구했고 나는 언뜻 떠오른 엘 고어의 이름을 제시했다. 8년간 부통령도 지냈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도 출마했으며, 두 기자가 속한 케이블 방송 <커런트 티브이>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엘 고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엘 고어는 절대 불가라고 외쳤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엘 고어가 오면 그도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될것이라는 했다. 두 기자의 대북 적대 행위를 사주하고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북한 인사들과 나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오면 가장 좋겠다라고 생각했지만 현직인 그가 직접 오기에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상당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서 나는 몇몇 전직 국무장관들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북쪽에서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후보군에서 제외시켰다. 1994년 방북해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라는 합의문을 이끌어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이름도 오갔지만 북쪽은 너무 옛날 사람이라는 이유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훗날에야 깨닫았지만, 북한은 처음부터 단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것 같다. 바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다. 8년간 미국 대통령을 지냈고 민주당의 어른으로서 오바바 행정부에서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이 있고 또한 현직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이기도 했다. 격과 중량감, 그리고 상징성 면에서 이만한 인사가 또 어디 있을까?사실 2000년 10월에도 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방북을 위한 북미간 조율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그해 10월 23일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북한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일정을 북쪽과 논의했다. 나도 그때 북한에 머물고 있었는데 북한 고위 관계자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국내 정치 상황과 방북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엘 고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클린턴의 방북은 무산되었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왼쪽)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처음 방문해 김정일(오른쪽) 국방위원장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상호 방문을 조율했으나 무산됐다. 이 때문에 북한은 2009년 두 기자 석방 협상 때 미국쪽 특사로 빌 클린턴을 지목했다. 사진 연합뉴스

 

그로부터 9년이나 흘렀지만, 북한은 여전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원하고 있었다. 북쪽 인사들은 집요하리 만큼 빌 클린턴의 방북을 강조했고 내게 미국쪽을 꼭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미국쪽에 잘 전달하겠다고 약속을 전제로, 북한 당국에 한 가지 역제안을 했다. 두 기자를 절대, 단 하루라도 감옥이나 노동교화소로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초대소에 머물게 하도록 요청했는데 그것은 북한이 두 기자를 석방할 용의가 있고 석방 준비가 이미 끝났다는 신호를 미국에 보내는 것이라고 설득했다.한편으로, 70년을 이어온 북미간 적대 관계와 북한을 정상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으로서는 선뜻 수용하기 힘든 조건들이라는 생각이 잠시 내 머리를 스쳐갔다. 미국으로선, 북한이 두 기자를 불법으로 납치·감금하고 있다고 여겼고, 만약 사과를 하고 사면을 청하게 되면 북한의 실정법과 체제를 인정하는 셈이 되기에 쉽지 않은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석방이 가능하다면 아주 받아들이기 힘든, 터무니 없는 조건도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북한은 이미 두 기자를 석방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미국 쪽에 전달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평양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북쪽이 요구한 석방 조건들을 미 정부에 전화로 알려주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판단에 미국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 협상 조건들을 좀 더 상세하게 행정부 쪽에 전달했고 공식 사과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이 중요하다는 것도 강조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북한과 소통할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그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7월10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국무부 미팅에서 “두 기자와 가족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크게 후회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지난 6월 북한을 비난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또한 북한이 요구한 ‘어폴러지’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후회와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두 기자의 범법 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리고 북한 체제에 따라 적법한 사면이 이루어졌으면 한다는 희망을 언급함으로써 북쪽의 요구에 화답했다. 열흘 뒤인 7월20일에는 힐러리 클린턴 장관이 두 기자의 석방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메세지를 표명하였다. 나는 석방이 임박했다는 희망적인 예감에 그동안 미루어왔던 여름 가족 여행을 떠났다.

2009년 8월 4일 박한식 교수의 중재를 통해 방북한 ‘특사’ 빌 클린턴(앞줄 왼쪽)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앞줄 오른쪽) 국방위원장을 만나 3시간 넘는 담판을 끝낸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09년 8월5일 북한의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된 유나 리와 로라 링 기자가 빌 클린턴(맨 왼쪽) 전 대통령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 부근 버뱅크의 밥호프공항에 도착해 ‘커런트 티브이’ 회장인 앨 고어(가운데) 전 부통령 등의 환영을 받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머틀 비치에서 가족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에이비시>(ABC)와 (시엔엔)을 비롯한 공중파 방송 뿐만 아니라 애틀란타의 지역 방송국들까지 뉴스 중계차를 몰고 머틀 비치로 나를 찾으러 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지금 북한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해변에서 수영복 반바지 차림으로 인터뷰를 할 수 없어서 동네 옷가게에서 급하게 서둘러 양복과 넥타이를 구입해서 입어야 했다. 갑작스럽게 몸에 꼭맞는 옷을 찾기 쉽지 않아서 꽤나 큰 양복을 대충 걸쳐 입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2009년 11월9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잡지 <글래머> 주최 ‘올해의 여성상’을 받은 유나 리(왼쪽)와 로라 링(오른쪽)이 시상식에서 141일간의 북한 억류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마침내 8월5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방북해 북한 정부에 ‘어폴러지’라는 단어를 사용해 사과했고, 두 기자는 사면을 받고 풀려나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와왔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석방 직후 로라 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인사를 했다. 참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도 미국도 두 기자의 석방 협상을 핵문제와 연계시키지 않았고 또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심 이 석방 협상이 북미관계 개선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두 기자가 석방된 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박한식 조지아대학 교수가 미국 정부를 대신해서 협상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노코멘트’, 나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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