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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철 칼럼] 디제이의 ‘열린 자주’를 생각한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25. 04:17

[백기철 칼럼] 디제이의 ‘열린 자주’를 생각한다

등록 :2020-06-24 18:11수정 :2020-06-25 02:07

 

디제이는 2000년 김정일과의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힘을 합쳐 주도하되 주변국 지지를 얻는 ‘열린 자주’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신기루 같은 ‘트럼프의 평화’에 기대어 ‘열린 자주’의 공간을 스스로 닫은 건 아닌지 곱씹어봐야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2018년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해 자신의 자리로 다가가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폭탄 발언에 대한 남쪽 코멘트 중 문정인 특보의 반응이 눈에 띄었다. “김여정이 대남 비난성명 형식으로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그간 남북 해빙 과정에서 동분서주했던 김여정의 말폭탄은 남쪽에 대한 극도의 불만 표출인 동시에 자신의 행보에 대한 반성이란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고 남북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한 북한의 ‘자폭적’ 행태는 어떤 기준으로도 용납하기 어렵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늦게나마 제동을 거는 모습을 보인 건 그나마 다행이다. 김여정의 급작스러운 돌변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2년을 되돌아보게 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 이후 남이든 북이든 믿지 못할 트럼프에게만 너무 의지해 상황을 돌파하려 한 것은 아닐까. 애초부터 ‘트럼프의 평화’는 신기루였던 건 아닐까.

 

북한은 쇼맨십 강한 트럼프를 이용해 빅딜을 시도했지만 북에 냉담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관료·군부·의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남한 역시 북한과 미국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북핵 해결의 초입에 들어서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한반도 평화의 동력을 남북의 성실한 교섭보다는 트럼프에게 크게 의존하면서 길을 잃은 형국이다.

 

트럼프에 의한 평화가 근본 없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가깝다는 건 최근 트럼프와 볼턴의 막장극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과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난맥상이라면 북핵 교섭을 책임 있게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북은 한반도 평화에 ‘1도 관심없는’ 트럼프에게 의존하는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나마 성과를 냈던 김대중식, 노무현식, 멀리는 노태우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고 남북이 자율공간을 만들어 교섭하고 타협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호응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번이나 ‘열린 자주’를 언급했다. 김정일과 이른바 ‘자주’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서였다. 김정일은 “조선 문제는 결코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제이는 이렇게 응수했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힘을 합쳐 주도하되 주변국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나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배타적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가 돼야 합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디제이 방식은 말 그대로 ‘열린 자주’에 부합한다. 1999년 임동원의 포괄적 접근 구상을 토대로 미국의 페리 프로세스가 도출됐고, 1999년 5월 페리의 방북으로 북-미 간 화해 기류가 조성됐다.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그해 말 성사 직전까지 갔던 빌 클린턴의 방북이 무산된 건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2년간 우리는 트럼프에게만 의지해 ‘디제이식 열린 자주’의 공간을 스스로 닫아버린 건 아닌지 곱씹어봐야 한다. 주변국의 지지 속에 남북이 주도하는 평화 프로세스로 가야 한다. 한반도 평화의 확고한 메시지와 실천 방안을 우리가 내놓고 남북이든 북미든 일련의 접촉 과정에서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

 

미국 못지않게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도 협력해야 한다. 특히 이웃한 일본을 지금처럼 남북협력의 훼방꾼으로 남겨둬선 곤란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년 고군분투하면서 상당한 성과도 거뒀다. 볼턴의 책은 역설적으로 현 정부가 개념 없는 트럼프와 ‘꼴통’ 볼턴, 겉과 속이 다른 폼페이오를 상대로 얼마나 악전고투했는지를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의 남은 2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지난해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가 접점을 찾지 못하고, 북한이 외교라인을 문책할 때쯤 우리도 새로운 접근을 준비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더 확실한 ‘열린 자주’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김정은 역시 2년의 성과를 연락사무소 폭파하듯 없던 일로 할 건 아니다. 트럼프보다 문 대통령이 훨씬 성실한 교섭 상대라는 점을 북은 잘 알아야 한다. 시간을 두고 점검하면서 어찌 됐든 남북의 두 정상이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25 발발 70년이지만 분단의 악순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누굴 원망할 것 없다. 민족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북을 탓할 것도, 우리만을 질책할 것도 없다. 미국이나 중국만 바라볼 일도 아니다. 우리 민족의 총체적 역량, 역사적 잠재력의 부족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백기철 l 편집인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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