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박석무]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28. 06:30

제 1123 회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이제 한국의 현실을 점검해 봅니다. 4·19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분명하게 꽃을 피웠는데, 그 꽃이 군사쿠데타라는 모진 비바람을 맞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혹독한 시련 아래 오랫동안 시들어 있었습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압제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80년 서울의 봄’으로 탄압과 독재의 핍박에서 해방되려나 했더니, 5·17의 더 무서운 폭압으로 1987년 6·10항쟁까지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죽고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가요.

민주주의를 되살려내자던 무서운 시민들의 항쟁은 5·18에서 정점을 이루며, 6·29의 항복을 받아냈고, 국민 직접 선거에 의한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 또한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이어서, 온 국민은 독재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민중투쟁의 힘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이만하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합니다. 위대한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피나는 투쟁의 결과였음이 분명합니다. 이상적인 민주국가에 이르기에는 아직 길이 멀다 해도, 그래도 자유와 인권의 문제, 기아로부터 벗어나는 문제는 상당한 수준에 오른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국민들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일까요.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지속해 가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해가고 국민의 교양을 높여 격이 높은 국민의식을 통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다산연구소는 오래전부터 ‘다산으로 깨끗한 세상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다산학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해 격이 높은 교양인들의 세상이 와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묵은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자주 읽지 못했던 「연암 박지원 문학선집」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김명호편역, 2007, 돌베개)』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산만이 아니라 ‘연암과 다산으로 격조 높은 세상을’이라는 표어로 바꿔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는 책 제목과, “나는 조선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는 다산의 시는 중화사상에 빠져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경고를 내린 글인가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다산보다 25년 전에 태어나 32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한 세대 앞선 연암은 조선 최고의 사상가요 문학가였습니다. 어떤 기록에도 연암과 다산은 자리를 함께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다산의 책에는 연암의 저서를 인용한 부분이 많고, 연암의 절친인 초정 박제가와 다산은 아주 가까운 사이로 만나기도 했고 의술 연구를 공동으로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산은 연암의 사상과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실학자로서의 연암은 북학파의 효장이었으니, 그 부분에서도 연암에게 큰 영향을 받아,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연암의 소설·문·시 등을 읽어보면, 그런 시절에 그러한 문학가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요. 이제 더 긴 이야기는 멈추고, 다산과 함께 연암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다산도 읽고 연암도 읽어서 실천하는 많은 국민들이 나온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밝아질까요.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