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등록 :2020-07-27 15:35수정 :2020-07-27 15:38
차별·핍박 이겨내며 ‘민족성’ 고수
남-북 한쪽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
중재자·촉매자로서 남북 잇는 가교
수난의 근대사 한민족 10% ‘떠돌이’
만주 이주 거쳐 중국에 남은 ‘조선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
일제 징용에서 귀국 못한 ‘재일동포’
해방 이후 이민간 ‘코리안 아메리칸’
같은 말·김치·집단기억 ‘한민족’
반쪽 조국만 선택하도록 강요당해
2세 3세도 분단 현실에 정체성 고민
“내 조국은 하나·시대정신은 통일”
박한식 교수는 그 자신 이산가족이자 재미 한인으로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 재외동포들을 통일의 촉매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9년 현재 재외동포는 180개국에 749만명을 헤아린다. 사진 재외동포재단 ‘코리안넷’ 제공
길을 찾아서-36회 코리안 디아스포라
나는 재외동포다. 중국에서 재외동포로 태어나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1965년에 도미하여 55년째 미국에 살고 있으니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외동포로 살아온 셈이다. 아마도 재외동포로 생을 마치지 않을까 싶다. 평생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과 헌신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 밖에서 남북 양쪽을 좀 더 객관적이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 북쪽 모두를 필요에 따라 방문할 수 있었고 한반도 문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미국 주류 사회에 조언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살고 있는 미국 문제에나 신경 쓰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재외동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타국에서 인종차별과 핍박을 견디고 또 극복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으며 거주국 주류 사회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지혜도 터득했다. 다양성을 경험하고 남과 북 모두를 편견이나 한쪽에 치우침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재외동포는 남과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또는 선택을 강요받는 차원을 넘어서 중재자로서 그리고 촉매자로서 남북 평화통일의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특별한 자산이다.
디아스포라의 어원은 원래 예루살렘을 떠나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의든 타의든 모국을 떠다 타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말로는 ‘이산’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대가족 중심의 우리 문화를 생각하면 우리 민족 전체가 이산가족이다. 재외 한인 이산의 역사는 우리 민족 수난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2019년 한국 외교부 발간 자료를 보면 한반도 밖에 거주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수는 750만명에 이른다. 남과 북을 합친 인구의 10분의 1이 국외에 살고 있는 셈이니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전세계 200여 나라 가운데 인구가 이에 못 미치는 나라가 셀 수 없이 많다.
미국과 중국에 각각 약 250만명이 거주하고 일본에도 약 80만명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유럽에도 70만명에 가까운 우리 민족이 살고 있으며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멕시코, 브라질, 그리고 쿠바 등을 비롯한 중남미에도 10만명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 각기 상이한 이주 과정과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간도 지방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중국 ‘조선족’ 동포가 되었고 연해주로 건너가 자리잡았던 이들은 스탈린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고려인’이 되었다.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재일동포’로 불리고 해방 이후 한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코리안 아메리칸’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생김새도 꼭 닮았고 김치를 먹으며 집단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다.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250만의 우리 민족은 조선족으로 불린다. 이들 이주 과정과 배경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배고픔과 굶주림 그리고 일제의 폭정에 못 이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월경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독립투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1906년 조선 망국의 설움을 안고 북만주의 흑룡강성(헤이룽장성)으로 이주했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 소식은 국경 너머 살던 조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모국의 분단과 전쟁의 참상 그리고 정치적 혼란은 귀향을 그토록 바라던 그들의 소망을 산산이 앗아가 버렸다. 그들이 그리워하던 조국은 더 이상 고향을 떠나올 때 그대로의 조국이 아니었다. 하나의 조국이 아니라 둘로 갈라진 반쪽의 조국이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조선족들은 자연히 한반도의 반쪽만을 조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았고 한국을 자본주의의 병폐 정도로만 여겼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선족들이 한국 사람들을 보는 시각도 우호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의 역사도 중국 조선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근과 빈곤을 피해서 이주했고 경술국치 이후 더 많은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러나 1860년 이후 연해주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켜 관리하던 러시아는 1930년대에 17만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향을 떠나 질곡의 삶을 견디던 연해주 동포들은 또 한번 그 뿌리가 뽑히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연해주 고려인들도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반쪽의 조국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냉전 종식 이후 사회주의 가치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나고 한국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여전히 두 개의 조국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둘러싸고 남북한 당국은 대립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봉오동 전투 승리 100돌인 지난 6월7일 유해 봉환 계획을 재확인했다. 엠비시 뉴스 갈무리
지난 6월23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홍범도 장군 유해는 고향인 평양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해, 문재인 정부의 카자흐스탄 유해 송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진 엠비시 뉴스 갈무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두고 남과 북 사이에 불거지고 있는 작금의 볼썽사나운 행태는 가히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평양이 고향인 홍 장군의 유해를 북측과 상의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서울로 봉환해 오겠다는 남쪽 정부와 평양으로 송환해 오는 것이 조상 전례 풍습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쪽 정부의 유해 봉환을 책동과 도발로 폄훼하는 북측을 홍 장군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서 초라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던 홍범도 장군이 묻히고 싶었던 조국은 반목과 갈등으로 으르렁대는 반쪽의 조국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국 독립의 소원을 안고 국경을 넘던 때 있던 그 조국은 사라지고 죽어서도 남인지 북인지 선택을 강요받는 것 같아 가슴이 저며온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껏 유해도 찾지 못한 채 남북 모두 가묘로 모셔둔 상태다. 지난 1946년 백범 김구 주석이 서울 용산 효창공원 안에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 묘’ 옆에 마련해둔 안중근 의사 가묘해서 해마다 3월26일 순국일에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2015년 순국 105주기 때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참배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0년 평양 애국열사릉의 안중근 의사 묘비에 북한에 있는 후손 20여명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 춘천엠비시 제공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 의사의 유해 봉환도 홍범도 장군의 사례만큼이나 남북 간의 논쟁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은 내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어려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안 의사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자랐다. 1980년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하얼빈역을 찾아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안 의사는 북한에서도 애국열사로 존경을 받고 있다. 서울의 효창공원에 안 의사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처럼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안 의사가 그리워하던 그리고 묻히고 싶었던 조국은 하나 된 조국이었을 것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건 재일동포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국은 둘로 갈라져 있었고 한국전쟁의 참상은 일본 동포들로 하여금 차라리 일본에 남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차별과 핍박보다 그들을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던 정치적인 현실이었다. 재일동포 사회는 70년이 넘는 세월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두 조직으로 갈라져 대립과 반목으로 맞서왔다. 재일동포 사회는 둘로 갈라진 조국의 축소판이었으며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선택 후에도 다른 한쪽으로부터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낙인이 찍혀 살아온 것이 재일동포들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지난해 재미동포 2세 전후석 감독이 만든 다큐 영화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임천택·임은조(헤로니모) 부자의 삶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얼마 전 전후석 감독이 연출한 <헤로니모>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모진 풍파를 견뎌온 쿠바 이민 1세대인 임천택씨와 자신의 정체성에 번민하는 쿠바 한인 2세대 헤로니모(임은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임천택씨는 1905년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이주했다가 1921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였다. 그리고 아들인 헤로니모는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는 전 감독이 처조카이기도 하지만 조국의 분단 앞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헤로니모의 인생 여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라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싶어 했던 임 선생 부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이라는 엄혹한 정치 현실 앞에 한인회의 설립이 무산되고 어느 한쪽으로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착잡했다.
재외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미국이다. 약 250만명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1902~03년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 이주가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이민자는 1960년대 이후에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미국에 정착한 동포들이 다른 동포사회와 구분되는 점은 대다수가 남한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투철한 반공 의식이 여전히 몸에 배어 있고 북한은 상종 못할 집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같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단체도 존재하지만 북한의 붕괴는 사필귀정이고 북한의 붕괴를 통한 독일식 흡수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 정부도 영사관과 각종 단체들을 통해 미국 동포들에게 반쪽의 조국만을 강요하는 정책들을 미국 내에서 꾸준히 행해오고 있다. 나도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친북인사니 종북이니 하는 비판을 받았고 한국 정부로부터 북쪽 방문을 여러번 만류당했고 연구기금 신청 제한 등 다양한 불이익을 당했었다. 이렇듯 나도 반쪽의 조국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박한식 교수는 재외동포들은 분단된 조국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는 고통스러운 강요를 받아왔기에 누구보다 ‘하나 된 한반도’를 열망한다고 말한다. 2018년 10월 경기천년 기념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 출품작인 재일동포 작가 박일남의 <라인-사이-한 나라>. 사진 경기문화재단 제공
나에게 있어서 조국은 그때도 지금도 하나다. 남도 조국이고 북도 조국이다. 다만 지금은 분단되어 있을 뿐이지 언젠가는 통일의 길로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통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통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없이 평화만을 강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은 안일해 보인다.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통일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남북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꾸준히 통일을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만이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분단 이전의 고향을 떠난 이산 1세대는 모두가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때의 시대정신이 그랬다. 적극적으로 독립활동에 참여한 독립투사들도 필부도 모두 조국의 독립을 소원하고 그 염원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이들도 있었고 친일파가 득실득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대정신은 대한독립이었고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헌신으로 해방은 찾아왔다. 작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통일이다.
통일 준비 과정에서 남과 북 양쪽을 모두 접할 수 있는 재외동포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남과 북 사이에 양자택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한민족 그리고 하나의 조국이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남과 북 모두를 편견이나 한쪽에 치우침 없이 바라보면서 남과 북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해야 한다. 특히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750만명의 재외동포는 역사적, 정치적, 이념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른 어떤 민족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재외동포들의 이러한 풍부하고 다양한 체험과 경험은 통일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통일 조국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통일의 과정은 ‘민족 자주의 원칙’에 의거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주변국한테 한반도 통일이 그들의 국익에 해가 아니라 득이 될 것이라는 외교적 설득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는 통일 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750만 재외동포 중 3분의 2인 500만명의 동포가 G2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있어 이 두 강대국의 협조와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과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거주국에서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력 신장을 위한 노력도 해야 하고 조국과 거주국을 잇는 중요한 가교 구실도 꼭 필요하다.
구술 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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