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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소통’이 뉴딜과 미국 사회를 살렸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8. 26. 06:07

‘국민과의 소통’이 뉴딜과 미국 사회를 살렸다

등록 :2020-08-25 04:59수정 :2020-08-25 07:41

 

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04

 

1930년대 미국의 한 가정에서 사람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도서관 소장

 

뉴딜은 여러 면에서 불완전했고 때론 광범위한 비판의 표적이 됐다. 그걸 성공의 반석 위에 올린 건, 대통령과 국민의 끊임없는 소통이었다. 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 불린 루스벨트의 라디오 연설이 대표적이었다. “잠시 국민 여러분과 은행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1933년 3월12일의 첫 라디오 연설은 화롯가에 앉아 조곤조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평균 청취자 수는 약 5400만명(당시 미국 성인인구는 8200만명)에 달했다. 노변정담이 끝난 뒤 1주일간 백악관엔 45만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뉴딜 시대를 거치며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새롭게 정의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뉴딜주의자들은 국가, 즉 정치적 힘이 자본, 즉 경제적 힘을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을 두어 자본주의에 피폐해진 인민의 삶을 복원시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뉴딜에 자유주의(리버럴리즘) 개념을 접목시켜 전통적인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적 자유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1933년 취임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격렬하게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정치문화에 파열음을 냈다. 이전 그 어느 대통령도 루스벨트가 했던 것처럼 자본가들을 ‘국민 여론의 법정에서 기소당할 부도덕한 환전상들’ ‘미친 듯이 이윤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 세대’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 어떤 정치인도 국가계획에 의해 주도되는 통일적 구제행위를 요청하지 않았다. 루스벨트 전임자 중 누구도 연방정부가 ‘교통과 통신, 기간산업을 관장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뉴딜자유주의와 미국적 복지의 탄생>, 김진희 경희사이버대 교수, 2013)

 

뉴딜 이후 리버럴리즘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주의’로 번역하는 게 훨씬 적절한 단어가 됐다. 미국 사회당 좌파는 뉴딜을 ‘야만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제3의 길’이라며 결국 실패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 예상은 대체로 빗나갔다. 뉴딜이 미국을 ‘복지국가’로 탈바꿈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사회를 움직여 수십년에 걸친 ‘리버럴의 시대’를 불러온 건 사실이다.

 

뉴딜은 여러 면에서 불완전했고 때론 광범위한 비판의 표적이 됐다. 그걸 성공의 반석 위에 올린 건, 대통령과 국민의 끊임없는 소통이었다. 노변정담이라 불린 루스벨트의 라디오 연설이 대표적이었다. “잠시 국민 여러분과 은행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1933년 3월12일의 첫 라디오 연설은 화롯가에 앉아 조곤조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형식이라 노변정담(Fireside chats)으로 불렸다. 효과는 엄청났다. 사람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또는 식당이나 극장에서 동료들과, 때론 길거리에 정차한 택시 주변에 모여서 루스벨트의 라디오 연설을 들었다. 노변정담의 평균 청취자 수는 약 5400만명(당시 미국 성인인구가 8200만명이었다)에 달했다. “소득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으면 현 체제를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창의적 정신으로 경제를 일군 자본가들은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존에 필요한 걸 벌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1933년 5월7일 라디오 연설)

 

노변정담은 쌍방향 소통이었다. 루스벨트가 연설 말미에 “여러분의 어려움을 저에게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하자, 백악관엔 45만여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요약해서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다시 재분류돼 해당 부처로 전달됐다. 루스벨트는 신문·방송을 대하는 자세도 전임 대통령들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1주일에 평균 두차례 기자들을 만나 자유롭게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전임자들이 정해진 형식에 따라 기자회견을 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뉴딜의 목표는 흔히 ‘3R’로 표현했다. 구제(Relief), 재건(Recovery), 개혁(Reform)이 그것이다. 우리가 ‘뉴딜’ 하면 흔히 떠올리는 대규모 토목·건설사업과 일자리 창출이 바로 ‘구제’ 또는 ‘재건’에 해당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미국 사회를 바꾼 건, 세번째 목표인 ‘개혁’이었다.

 

수치로만 보면, 뉴딜은 ‘경제 회복과 실업 극복’이라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첫 임기 4년간(1933~37)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6%였고 실업률은 25%에서 14%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두번째 임기 중반인 1938년에 실업률은 19%까지 치솟았고 산업 생산은 20% 가까이 감소했다. 미국 경제를 늪에서 구한 건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뉴딜의 가치를 훼손하진 못한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진 못했지만, 뉴딜은 미국 사회를 바꿨다. 지금까지 정부의 관심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간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법적 울타리를 마련한 건 분명했다. 두 축은 와그너법(전국노사관계법)과 사회보장법이었다. 1935년 7월 제정된 와그너법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고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금지했다. 이로써 노동조합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길을 텄다. 같은 해에 실업보험과 노인연금을 담은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도 의회를 통과했다. 연금을 납입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매우 제한적인 입법이었지만, ‘공적 복지’ 개념을 거부했던 미국 사회 인식을 바꿨다는 점에선 의미가 컸다. 1938년엔 최저임금을 시간당 25센트로 정하고 노동시간을 주당 최대 44시간으로 조정하는 공정근로기준법이 제정됐다. 마지막 ‘뉴딜 개혁입법’이었다.

 

뉴딜 개혁입법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논란과 반발을 불러왔다. 루스벨트에겐 ‘사회주의자’ ‘볼셰비키’ 또는 ‘독재자’라는 공격이 가해졌다. 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루스벨트가 ‘정치적 평등과 사상의 자유, 기회의 균등을 훼손하며 미국을 독재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후버의 공격은 루스벨트에겐 오히려 정치적 도움을 줬다. 루스벨트는 후버를 ‘낡은 체제의 상징’으로 몰아붙이며 뉴딜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후버의 그림자는 수십년간 공화당의 발목을 잡았다. 신뢰를 잃은 정당과 정치인이 스스로를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고, 새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만으로 국민 지지를 되찾기 힘들다는 상징적 사례였다.

 

루스벨트 시대에 미국 정치지형은 180도 바뀌었다. 1932년 루스벨트 집권 전까지 70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단 두 사람(그로버 클리블랜드, 우드로 윌슨)이었다. 이 기간에 민주당이 백악관과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한 시기는 6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이후 50년간 민주당은 8차례 대선에서 이겼고, 상하 양원 모두에서 다수파 지위를 굳건히 했다. 극적인 변화의 밑바탕엔 유권자의 ‘뉴딜 연합’이 깔려 있다. 뉴딜 연합은 1936년 루스벨트의 재선을 통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 흑인과 남부 백인, 대도시의 이민자·노동자, 중산층과 집 없는 빈민, 여성과 청년이 뉴딜 연합의 우산 아래 결속했다. 이들은 모두 뉴딜의 혜택을 입었고, 복지국가의 개념이 계속 확대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진보 다수파의 시대’가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뉴딜 연합은 보여줬다.

 

미국 정치학자 크리스티 앤더슨의 저서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The Creation of Democratic Majority)는 1930년대 노동자와 이민자, 도시빈곤층이 어떻게 민주당 지지 기반으로 편입됐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1932년 대선에서 2281만표(전체 투표자의 57.4%), 1936년 대선에선 2774만표(60.8%)를 얻었다. 이는 12년 전인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얻은 표(914만표)의 세배에 달했다. 몇번의 선거를 거듭하면서 민주당은 의회와 행정부 모두에서 압도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앤더슨은 시카고의 흑인·이민자 거주지역에서 공화당의 총득표수는 변화가 없는데도 민주당 득표수가 크게 늘어난 점을 주목했다. 루스벨트 시대에 민주당이 약진한 건, 그동안 투표행위 바깥에 있던 노동자와 이민자·흑인·여성들이 새롭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앤더슨은 밝혔다.

 

정치학계의 대표적 논쟁거리지만, 정당 지지층의 재편성을 통해서 극적인 정치지형 변화가 나타난다는 이론은 한국 현실에 비춰봐도 의미가 있다. 2020년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약진한 걸 이런 ‘정당 재편성’의 결과로 보는 시각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한국 정당의 재편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기숙 교수는 “정당 재편성은 일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점점 견고해진다. 한국에서 정당 재편성은 2004년 총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통적 진보층과 호남, 수도권의 중산층이 결합해 열린우리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 집단의 연대는 오래가질 못했다. 전통적 진보층은 민주노동당으로, 호남은 민주당으로, 수도권 중산층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서울시장 쪽으로 흩어졌다. 이게 다시 복원된 것은 2010년 지방선거 때부터다. 그때부터 정당 재편성은 점점 공고해졌고 그 연장선상에 이번 4·15 총선이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1930년대 미국 민주당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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