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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승 칼럼] 의술에 앞서 민주주의부터 배워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1. 02:47

[안재승 칼럼] 의술에 앞서 민주주의부터 배워라

등록 :2020-09-09 18:17수정 :2020-09-10 16:45

 

의사단체들이 이번 집단휴진 과정에서 드러낸 인식과 행태는 바닥 수준이었다. 오만, 독선, 아집, 무책임, 몰염치 등등.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이 공동체의 기본 원칙을 허무는 일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래픽 고윤결. 사진 한겨레, 연합뉴스

 

의사단체들의 집단휴진, 법적으로는 불법 진료거부(의료법 59조)가 일단락됐다. 수술과 진료 연기로 큰 고통을 겪은 환자들이 뒤늦게나마 치료를 받고 국민들도 불안감을 덜 수 있게 돼 다행이다. 그럼에도 이번 집단휴진 과정에서 의사단체들이 보여준 상식 이하의 행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건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이번 4대 의료정책(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육성)에 대해 의사단체뿐 아니라 시민단체와 노동계도 이유는 다르지만 비판했다. 문제는 의사단체들의 행태다. 오만, 독선, 아집, 무책임, 몰염치 등등.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만 일컫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때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제1 원칙은 대화와 타협이다. 토론을 통해 차이를 확인하고 상호 양보를 통해 절충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 자신의 이해를 100% 관철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정부는 의사단체들이 집단휴진을 예고하자 지난달 5일 협의체를 만들어 요구 사항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은 이에 앞서 대한의사협회(의협)가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협의체 참여를 거부한 채 4대 의료정책의 전면 철회를 요구하며 집단휴진을 강행했다. 정부가 공식 발표한 정책을 논의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철회하라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비민주적 의사결정 행태는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드러났다. 의협의 산하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의협이 정부·국회와 협의해 가져온 합의안을 번번이 뒤엎었다. 특히 지난달 30일엔 집단휴진 연장을 부결한 1차 투표 결과를 뒤집으면서까지 판을 깼다. 전권을 위임받은 최대집 의협 회장이 지난 4일 정부와 합의한 최종안에 대해서도 강경파들은 “독단적 행동”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의대생단체는 한술 더 떴다. 집단행동에 반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들’은 지난달 31일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에서 “의대협(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이 동맹휴학과 국시(의사 국가시험) 거부에 대한 투표를 기명으로 진행했고, 학교와 학년별 투표 현황을 공개해서 각 학교 대표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학생들을 동원하도록 부추겼다. 심지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선배나 전공의의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국시 거부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의 명단이 익명 커뮤니티에 공유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다수결 원칙에 승복해야 한다. 하지만 의사단체들은 소수의견은 무시하고 다수결 원칙은 부정했다.

 

민주주의는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의사단체들은 책임엔 눈감은 채 권리만 내세웠다. 집단휴진으로 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의료 현장을 떠났다. 애초 의사단체들은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업무는 제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그 결과 응급환자가 진료 인력이 있는 응급실을 찾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없다.

 

민주주의는 상호존중의 바탕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의사단체들은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르지만(‘모자라지만’의 오기)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었다. 오만의 극치다. 세상에는 전교 1등은커녕 반에서 1등 한번 못 해본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윤리를 지켜가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의사만큼 돈을 벌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시험 성적으로 사람을 가르는 천박한 인식을 드러냈다.

 

의사단체들은 집단휴진을 합리화하려고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렸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언론이 팩트체크를 통해 가짜뉴스라는 사실을 밝힌 뒤에도 퍼날랐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의대 커리큘럼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의대에서 의술 말고 무엇을 배우는지 모른다. 하지만 의대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정부가 어떻게 처리할지 국민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의사단체들은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의대생들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다시 집단휴진에 들어갈 것이라고 협박한다. 의대생들이 시험을 거부하는 마당에 정부가 알아서 기회를 주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의사단체들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의대생들이 먼저 시험 거부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재시험의 기회를 요청하기 전에 정부가 손을 내밀어선 안 된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이 공동체의 기본 원칙을 허무는 일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안재승 ㅣ 논설위원실장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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