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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아틀라스의 짐 / 이주은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3. 05:06

[크리틱] 아틀라스의 짐 / 이주은

등록 :2020-09-11 17:21수정 :2020-09-12 15:24

 

리 로리(Lee Lawrie, 1877~1963), <거대한 아틀라스>(Colossal Atlas), 청동, 뉴욕 록펠러센터.

여럿이 함께 산에 오를 때면 의아한 게 있다. 같은 코스를 걷는데도 배낭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내 경우엔 갈증을 해소할 이온음료와 당 떨어질 때를 대비한 에너지바, 그리고 얇은 바람막이 옷 정도를 배낭에 넣으면 충분하다.

 

짐 싸기에 관한 나의 철학은 직장 새내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 행사로 등산을 가는 날이었는데 평소처럼 나는 거의 맨몸으로 집합 장소에 나갔다. 그런데 하필 행사를 준비한 팀에서 내 배낭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럿이 나눠 먹을 간식과 여분의 생수를 일부 떠안겼다. 그날 나는 지독히도 힘에 부치는 산행을 했다. 누군가 인생 여정에서도 짐을 줄이며 살라고 하던데,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무조건 가볍게 꼭 필요한 짐만 선별하는 습관으로 살고 있다.

 

나와 정반대로 사는 친구 하나는 언제나 집안 살림을 다 옮기는 듯 잔뜩 뭔가를 챙겨 가지고 와서 쩔쩔매며 산을 오른다. 배낭 안에는 비옷과 우산, 물티슈, 무릎보호대, 커다란 수건, 갈아입을 양말과 티셔츠, 카메라, 미니 손전등, 접이식 의자, 응급의약품, 그리고 넉넉하게 담은 과일과 간식이 들어 있다. 자신의 깔끔한 성격 때문에, 혹은 같이 가는 친구들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그리고 갑작스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을 미리 고려하느라 늘어난 물품 목록일 것이다.

 

짐을 싸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이 자기 삶의 목표와 범위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먹고살 것만 일단 궁리하는 사람도 있고, 장기적으로 미래를 준비해두느라 늘 노심초사하는 사람도 있다. 짐 싸기는 글쓰기와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광대한 비전을 가지고 주위를 보면 짧은 글을 쓰기가 어렵고,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에만 관심을 두면 도무지 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리스신화 속에 나오는 거인, 아틀라스는 평생토록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다. 제우스가 티탄족과 싸움을 벌여 올림포스의 최고신으로 등극하려 할 때 아틀라스는 티탄족 편에 서 있었다. 그 바람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그는 온 지구를 등에 얹고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고 말았다. 짐을 벗는 잠깐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파르네세 아틀라스>(The Farnese Atlas), 로마시대, 대리석,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고고학박물관에 가면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아틀라스상이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지구본을 어깨 위로 올려 근육 불거진 팔로 버텨내고 있는 그는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그런데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세워진 청동으로 된 아틀라스는 양팔을 죽 뻗어 지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다. 마치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슈퍼맨처럼 보인다.

 

두 아틀라스를 비교해보면, 짐의 무게는 각자 삶에 임하는 태도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짐이 소모적이라고 느낀다면 한없이 지칠 것이고, 스스로 택한 야망의 무게라고 인정한다면 견뎌낼 만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노후를 대비하겠다고 수십개의 적금과 보험에 돈을 붓느라 좋은 시절을 다 바치는 아틀라스들이 많다. 말로는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대책 없이 불안해하는 사람도 짐에 눌린 아틀라스이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틀라스에게서 그리스신화 속 저주와 구속의 상징성은 약해지고 있다. 지도를 대표하는 단어로 자리잡은 아틀라스는 어느덧 전체적인 계획을 짠다는 매핑(mapping)의 의미로 변해가고 있다. 매핑이란 결국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짐을 꾸리며 버티는 일이 아닐까.

이주은 ㅣ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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