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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의 세시반] 왜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할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6. 05:18

[이충걸의 세시반] 왜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할까

등록 :2020-09-13 17:20수정 :2020-09-14 02:38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다들 걱정이 커지다 못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메타 근심’에 사로잡혔다. 이때 나의 불안은 보다 사적인 것이 되었다. 무감동한 것, 신세 지는 것, 거절하는 것,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아예 귀찮아하는 것, 그 대가로 한없이 편협해지는 것. 혼자 있을 땐 부적응 메커니즘이 자꾸 움직여 내 자신에 대해 최악의 비평가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보면 아예 <지옥의 묵시록> 커크 대령처럼 “공포, 공포 그 자체!”라고 읊조리게 된다.

 

얼마 전, 오래 알던 친구와 처음으로 불편해졌다. 그렇게 잘 꾸미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사람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누가 봐도 명백한 가짜 뉴스를 꺼내며 분개하는데, 조심조심 골목길을 다니다가 급발진으로 전봇대를 들이박은 차를 보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그 주장의 몇가지 오류를 반박하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얼굴로 으깨버릴 듯 나를 노려보았다. 어떤 논거를 제시해도 그는 그 망할 ‘신념’을 수정하지 않았다.

 

한동안 골치가 아팠다. 그가 원래 양식이 없는 사람이었는지, 편견이란 그렇게 강력한 건지, 일단 방향을 정한 생각은 저렇게까지 끈질긴 것인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서로의 데이터가 일반화되기에는 사고의 지점 자체가 떨어져 있는데다, 주장의 옳고 그름이란 각각의 만족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철학책을 완독한, 어떤 시스템에도 물들지 않은 대학원생에게서 완전히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어른이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가 숭상하는 이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반박하는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확증 편향―비틀린 사고 형태 중 유달리 일목요연하게 정리된―은 너무 잦아서 거의 교과서에 실릴 주제 같았다.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매일 쓰는 자물쇠의 원리 하나 모른다. 밥그릇보다 자주 쓰는, 물이 가득한 도자기 볼, 손잡이를 내리면 그 안의 모든 것이 물과 함께 파이프로 빨려간 뒤 다시 하수도로 내려가는 변기의 작동 원리는 말할 것도 없다. 평생 수백만번 들었던 일반 상식, 가을 하늘이 왜 파란지도 모르면서 한번 생각이 꽂히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에 밝은 신부, 손등에 털이 난 수녀를 상상하지 않는다. 고정관념이란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연과 상황의 필터 속에서 합의되는 것. 누가 어느 모임에서 “방송국 피디는 다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치자. 스스로 뚜렷한 사회 공개념을 가진 피디가 거기 앉았다면 그 비난으로부터 모든 피디를 엄호할 것이다. 만약 차선을 다투던 상대가 학교 선배였다는 걸 알면 당장 적대감을 철회할 것이다. 판단의 농도는 그렇게 개인의 이해에 달려 있으니까.

 

사실 작동법을 모르고 변기 물을 내리는 것과,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특정 법안에 찬성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누군가의 관점에 뚜렷한 근거가 없다면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의 의견 또한 근거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증할 수 없는 논리라 해도 지지자가 생기는 순간 기세등등해진다. 숫자는 무기가 되니까. 문제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깊은 이해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 믿음을 격려해주는 정보 앞에서만 분출하는 도파민의 기쁨! 결국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갈등만 남았다. 나의 이해와 관련된 갈등, 전혀 무관한 죽기 살기 갈등.

 

나라 전체가 누구도 운영하지 않는 방대한 실험실에 던져졌으나 어떤 자료 어떤 문헌도 처음 겪는 불안을 없애주지 않는다. 더 불안한 것은 스마트한 줄 알았던 지식인들이 역병의 잠식 속에서 반쯤 잊힌 사냥개, 도깨비 가발을 쓴 유령, 사상을 매춘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들은 멍청함으로 말을, 제스처로 언어를 삼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지성의 열매가 아니라 직립보행이나 세가지 색깔을 식별하는 것처럼 진화의 생리적 특징이라서 이성을 되찾고 싶다면 우리가 원숭이로 출발한 아프리카 사바나로 가야 할 것이다. 자연도태가 따라잡기에는 환경이 기절초풍 속도로 변하고는 있지만.아무리 책을 읽어도 타인들의 이성이 어디서 끝나는지, 나의 이해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사람들은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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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충걸의 세시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