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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직면과 존엄 / 김보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6. 04:40

[숨&결] 직면과 존엄 / 김보라

등록 :2020-09-14 18:53수정 :2020-09-15 13:17

 

김보라 ㅣ 영화감독

 

한 작가가 자신의 딸에게 편지를 쓴다. 그 딸은 태어나지 않은 상상 속의 딸이다. 책 <하틀랜드>는 미국 캔자스에서 자란 세라 스마시가 ‘백인 빈곤층’인 자신 가족의 삶을 집대성한 책이다. 책에 나오는 여자들, 즉 작가의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 등은 모두 십대에 엄마가 되었고 남성의 폭력을 경험했다. 스마시는 이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십대에 아이를 절대 낳지 않기로 했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 존재를 강하게 느꼈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책은 통계와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가족의 구체적 서사 속 빈곤을 통해 미국을 드러낸다.

 

책을 읽으며 금선 할머니 가족의 가난을 25년간 기록한 조은 교수의 책 <사당동 더하기 25>가 떠올랐는데, <하틀랜드>에는 5대에 걸친 방대한 기록에 당사자성이 더해진다. <사당동 더하기 25>에서 성실한 관찰자였던 조은 교수를 금선 할머니 가족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조은 교수는 ‘산타클로스가 가난한 사람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므로’ 금선 할머니 가족에게 물질적 지원이나 도움은 주지 않았다. 스마시는 어렵게 대학을 간 자신에게 300달러를 보내준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정중한 편지와 함께 그 돈을 돌려보냈다.

 

사회경제적 간극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스마시는 7번 결혼한 할머니 베티 대신, 고등학교 때 이미 48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던 엄마 제니 대신 종종 스스로 할머니이자 엄마가 되었다. 작가는 매 순간 ‘내 딸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길 바라?’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상의 딸을 고귀하게 대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대했다. 그녀에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이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하틀랜드>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작가에게 가난 자체보다 힘겨웠던 것은 사회가 ‘화이트 트래시’라 불리는 ‘백인 빈곤층’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백인 빈곤·노동자 계급은 미국의 구조적 문제를 인종적 빈곤보다 여실히 드러내기에 더 의도적인 무시와 낙인에 시달린다. 작가는 5대에 걸친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입학하지만 도시 사람들로부터 때로 단절감을 느낀다. 자신에겐 그저 일상인 농촌이 흙먼지 느낌으로 워싱한 고급 청바지, 플란넬 셔츠, 식품 보관용 유리병(메이슨 자)의 도시적 사용, 헛간 결혼식 등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낯설게 지켜본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부색으로 인해 더 쉽게 환대받기도 한다.

 

사회는 많은 경계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평생 사회로부터 기이한 질서와 수치심 혹은 허구의 자부심을 배운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경계에서 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것은 존엄이다. 존엄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명료히 인식, 수용하여 진짜 자신과 연결될 때 나온다. 작가는 이른 결혼, 불균형한 식사, 잦은 이사로 인한 교육의 부재로 엮인 가난에 대해 냉철한 시각을 갖는 동시에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노동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이 일하며 맛본 보람과 자신이 농장에서 살며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여자들이 심리적 고통을 겪지만, 필연적으로 터득하는 건조한 유머와 피해 의식을 넘어 삶을 살아내는 힘을 본다.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많은 시간을 ‘보통 사람’들의 블로그를 읽는 데 쓴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글에 대한 애정이다. 사회학이란 결국 잘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책 <하틀랜드>에는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던 한 인간과 가족의 위엄 있는 서사가 있다. ‘쓰레기’라 불리던 과거에도 스스로 ‘쓰레기’가 아님을 알고 선언했던 인간 존엄은 집안의 모든 가족에게도 공평히 향한다. 모두를 포함하는 이 시선의 힘은 치열한 자기 직면 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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