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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청탁이라는 본질을 흐리는 것들 / 석진환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7. 05:38

[편집국에서] 청탁이라는 본질을 흐리는 것들 / 석진환

등록 :2020-09-16 18:24수정 :2020-09-17 02:42

 

석진환 ㅣ 이슈 부국장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복무 특혜 의혹 기사엔 ‘민원’과 ‘청탁’이란 단어가 꽤 많이 등장한다. 두 단어가 구분되어 쓰일 때도 있고, 어떨 땐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사전을 보면, 민원은 ‘주민이 행정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이고, 청탁은 ‘청하여 남에게 부탁함’이다. 둘 다 가치중립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이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큰 차이가 난다. 민원은 ‘서민의 간청’ 같은 뉘앙스가 있는 반면 청탁은 ‘부정하고 은밀한 부탁’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김영란법의 정식 이름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줄여 ‘청탁금지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두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던 건, 청탁이 순식간에 민원으로 둔갑하는 무수한 장면들을 봐왔던 탓인 것 같다. 기자로서 권력기관 언저리를 맴돌 때, 힘 있는 이들과 그 주변의 많은 사람이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한 청탁’을 가리고 덮는 일을 흔히 접했다.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난해 초 사법농단 수사 때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국회 파견 판사를 통해 ‘재판 청탁’을 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받는 지인 아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취지의 청탁이었다. 서 의원은 자신의 청탁을 “지역구 어려운 사람의 고충을 살펴보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청탁을 받은 법원행정처도 그 내용을 정리한 문서에 ‘서영교 사건 민원 개요’라는 제목을 붙였다. 청탁을 하는 이도, 청탁을 받는 이도 부정한 행위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양쪽 모두 별것 아니라는 듯 민원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셀프 면죄부’를 행사한 셈이다. (검찰은 당시 정치인 재판 민원을 처리해준 혐의로 법원행정처 간부를 기소했지만, 청탁한 정치인 처분은 1년9개월째 결론 내지 않고 있다.)재판 청탁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민원 해결’이라는 가면을 쓴 청탁은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님, 민원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 말미에 “불이익만 없게 해달라” “제대로 진행되는지 한번 살펴주시라”는 면피성 후렴구를 구사하는 노련한 기술자도 많다.“식당에서 김치찌개 시킨 것을 빨리 달라고 하면 이게 청탁이냐”라는 정청래 민주당 의원의 말은, 이런 힘 있는 이들이 청탁을 얼마나 가볍고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지 잘 드러내 보여줬다. 식당 관할 세무서장이 주문이 밀린 찌개를 새치기하려 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 의원은 ‘행위자가 누구냐’는 핵심을 가리는 또 다른 기술을 시도한 것이다.추 장관 아들을 둘러싼 논란도 다르지 않다. 추 장관 부부 중 누군가 국방부 민원실에 전화했다는 건 논외로 해도 될 듯하다. 민원을 받는 곳에 청탁할 바보는 없다. 민원실에는 청탁을 들어줄 사람도 없다. 그냥 민원 전화다.보좌관의 전화는 문제가 다르다. 그는 집권여당 대표의 지시를 받는 신분이다. 보좌관과 통화했다는 상급 부대 장교는 수화기 너머 아른거리는 집권여당 대표 추미애를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직접 부대까지 찾아가 휴가 연장 처리를 하라고 당직병에게 지시했을까 하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보좌관의 전화는 문의도, 민원도 아닌 청탁 전화다. 추 장관이 아닌 아들이 직접 보좌관에게 전화를 부탁했더라도 상급 부대에 청탁했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들이 여당 대표 보좌관이라는 ‘청탁 루트’를 활용할 줄 알았다는 사실만 도드라질 뿐이다.법적인 책임 문제는 뒤늦게 발동을 건 검찰이 따지면 된다. 그렇다고 추 장관이 지금처럼 “제가 (보좌관에게 전화를) 시킨 사실이 없다” “(보좌관에게) 확인하고 싶지 않다”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유지하면 민심은 더 나빠질 것이다. 뻔히 보이는 잘못에 그저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버텨 상황을 더 험악하게 만든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공정의 기준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추 장관은 검언유착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 발동이나 인사권·감찰권 행사 등을 통해 전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검찰에 요구하고 있다. 중요한 기준을 엄격하게 높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게 자연스럽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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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미애 아들 군복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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