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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칼럼] 언론자유 확보가 인권의 보루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23. 02:07

[조영래 칼럼] 언론자유 확보가 인권의 보루

등록 :2018-05-14 16:13수정 :2018-05-1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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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21면 조영래 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자유냐, 빵이냐?'하는 물음이 한동안 열병처럼 유행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50년대나 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 치고 이 종잡기 어려운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얼굴을 붉혀가며 토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자유냐, 빵이냐?'-이 간단명료하고 웅변적인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그 표현의 지나친 추상성 때문에 자칫하면 사람들은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말의 미로 속으로 끌고 가기 쉽다. 만약 이 질문이 암시하는 것이 `자유'와 `빵'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혹은 심지어는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운다'는 식의 양자택일적 이율배반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말하는 `자유'란 지극히 특수한 개념의 자유- 즉, `가진 자'들이 누리는 특권적인 형태의 `자유'를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억눌리는 사람들에겐 `자유' 와 `빵'은 서로 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노동자들에게 빵을 갖다 주는 것은 노동운동의 자유다.노예적 생존의 굴레에 묶인 사람들을 인간다운 삶의 지평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말의 자유, 단결의 자유, 개인적 및 집단적인 행동의 자유다. `자유냐, 빵이냐?'라니! 이처럼 오도되기 쉬운 물음이 한 시대를 뒤흔든 것은 우리 사회가 겪어 온 격심한 사상적 혼란과 그 속에서 형성돼 나온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곡해를 반영하는 것이다.이 같은 혼란과 곡해의 시기에 `인권'이란 용어가 마치 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유'의 별칭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일이 있었다. `유신체제'는 `인권'의 이념을 아예 드러내 놓고 경멸했다. "자유니 민주니 하는 서구적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몰지각하고 국적 없는 사대주의적 지식인들"-이것이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유신체제가 찍어놓은 낙인이었다. 그러나 미리 결론부터 말하건대 이것은 맹랑하기 짝이 없는 부당한 낙인이었고, 그 재앙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깊숙한 상처로 남아 있다.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온갖 형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이 특권 없는 사람들을 위한 해방의 이념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의 깃발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과 3·1운동의 깃발이기도 했다.`인권'을 우리의 역사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부로부터 `이식'된 서구적 가치로 보는 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국적 없는, 서구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대주의적 발상인 것이다.`인권'이라는 일반개념 아래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권리가 유형화되어 제시되고 그 중 특히 어느 것이 강조되는가 하는 것은 당대 억압의 역사적·사회적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이러한 의미에서 인권에 관한 각종선언은 각기 당대의 민중적 고통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봉건적 신분질서의 질곡에 대응하여 거주·이전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권리가 선포되고 중세교회의 독단이나 전체주의적 교조의 획일적 지배가 인간성의 다양한 요구를 억압하고 사람들의 인격적 통일성을 해체시키는 파괴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싹튼다. 근로대중이 급격한 산업화 과정의 진전을 위한 한낱 소모품으로 희생되고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그들 자신과 그 후손들의 인간적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아니라 타인의 자본축적을 위한 밑거름으로 되고, 말 뿐인 곳에서는 그 같은 `소외된 노동'의 아픔을 씻어내기 위한 노동운동의 자유와 노동자들의 제반권리의 확보가 인권문제의 초점으로 부각되게 마련이고, 소수민족·소수인종·소수종교에 대한 차별이 현저한 곳에서는 동등권의 요구가 최대의 인권문제로 등장하게 되기도 한다.이제 우리의 인권상황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비극적인 민족분단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고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공산주의를 신봉하였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치단위로 분열되어 서로 적대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한갓 강대국 권력정치의 소산이었을 뿐, 우리 민족사의 주체적 발전의 요구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이처럼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현실은 구조적으로 우리의 인권에 대한 적대적·파괴적인 현실이었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온갖 참혹한 인권탄압의 원천이 될 수 에 없었다.`북괴위협'이라는 한 마디는 정치적 반대의 자유를 일시에 얼어붙게 하는 마술의 주문(廚微)이었고 `고무·찬양' 또는 `이적행위'의 서슬 푸른 위협은 학문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언제라도 권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 묶어둘 수 있는 족쇄가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좌경·용공'이라는 딱지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기층 민중들의 자주적 단결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철통같이 봉쇄하는 봉인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 속에서 죽음과 같은 침묵은 계속되었고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전태일의 분신, 박종철과 권인숙의 희생, 4·19와 광주시민항쟁의 유혈 등이 상징하는 바와 같은, 숱한 비극적 영웅들의 극한적인 헌신과 희생을 앞장세운 우리 국민의 장구하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다.긴급조치와 광주학살의 역사적 반동기에 그 정점에 이르렀던 반(盼)인권의 물결은 1987년의 6월혁명을 분수령으로 하여 결정적으로 퇴조했다. 이제 우리는 인권을 위한 `전략적 공세'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들의 시민적·정치적 자유와 사회적·경제적 권리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인간다운 존엄에 어울리는 삶의 수준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고도 신속하게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면 최우선적인 비중을 갖는 전략적 고지는 무엇일까?`언론의 자유',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의 존재야말로 인권의 승리를 약속하는 가장 확실한 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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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영래, 노동자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