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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시대정신 껴안고 연구하고 실천한 참 스승이셨죠”[가신이의 발자취] 이효재 선생을 기리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6. 04:38

“평생 시대정신 껴안고 연구하고 실천한 참 스승이셨죠”

등록 :2020-10-05 18:12수정 :2020-10-06 02:39

 

제자들에게 들려준 ‘화두’ 셋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
‘남북 화해로 민족통일 이루자’

시대정신 충실한 지식인이자
인간 사랑과 무욕의 삶 사셨죠
평화·평등한 곳으로 편히 가세요

 

[가신이의 발자취] 이효재 선생을 기리며

5일 오전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빈소가 차려진 경남 창원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추모객이 고인의 영전에 꽃을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효재 선생님께서 10월 4일 오후 1시 46분 영면하셨습니다만 아직 실감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그늘이 너무 좋아서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합니다. 장례식장에 걸린 해맑게 웃고 계시는 선생님 영정사진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늘 들려주신 선생님의 화두가 생각납니다.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 ‘블랙 이즈 뷰티풀(검은 것은 아름답다)’, ‘남북이 화해하여 민족통일 이루자’입니다. 이 화두들은 선생님의 학문적 관심과 연구 그리고 실천적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라는 화두는 제자들에게 지역사회에서의 여성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도 이 화두를 지금도 강의할 때 즐겨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여성들이 지역사회를 단위로 하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선생님은 직접 여성민우회의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1980년대 초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이 생겨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적 역할의 회복과 강조는 지나침이 없다는 점에서 오늘날도 이 화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970년대 초 수업시간에 ‘검은 것은 아름답다’란 화두를 처음 들었을 때 흑인이 아닌 나는 남의 일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미국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존재가 ‘흑인’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의 처지가 미국 흑인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후에 이 화두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선생님의 학문적 관심과, 학문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유학에서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을 공부한 선생님에게 학문적 문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사회학도들이 제3 세계를 연구하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마지막 화두 ‘남북이 화해하여 민족 통일 이루자’는 선생님이 평생을 연구한 가부장제와 분단시대 가족과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이 화두의 뿌리는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과 슬픔, 빨갱이 낙인으로 인해 고통받는 월북 가족들의 고통에 있다고 봅니다.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분단 가족이나 월북 가족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이 화두는 ‘레드 콤플렉스’로 가족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가족이 떨어져서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선생님의 염원이라고 봅니다. 분단 가족의 아픔을 ‘여성의 한’으로 설명했던 논문이 분단시대의 사회학이었습니다. 한국사회학 학문사에서 볼 때 획기적 의미가 있는 논문이었습니다. 한국사회학의 학문적 주체성은 분단시대의 사회학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검은 것은 아름답다’는 화두의 확산과 실천은 ‘남북이 화해하여 민족통일 이루자’는 화두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강인순(오른쪽 두번째) 경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장례위원장인 지은희(맨 오른쪽) 전 여성부 장관이 2016년 여름 여성사회교육원 이사회가 끝나고 이효재(가운데) 선생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장례위원회 제공

 

선생님의 영정사진을 보며 3가지 화두가 떠오른 것은 선생님이 여성 지식인으로서 시대정신에 충실하게 연구하고 실천하신 ‘시대의 참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미군정과 분단, 군부독재를 거쳐 오늘날 민주화된 사회에 이르기까지 평생 연구하며 실천하셨던 선생님의 삶이 세 화두를 통해 보면, 시대정신에 맞춰 변화하고 진보하면서 일관되게 한길을 걸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보낸 학창 시절엔 ‘애국시’를 지어 고초를 겪었고, 70~80년대 군부독재 때는 ‘사회민주화’와 ‘여성운동(여성학 도입 포함)’에 헌신하셨고, 1990년 이후엔 소외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한 정신대운동과 통일운동, 지역도서관운동, 북한 어린이를 위해 털 목도리 떠서 보내기,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책읽어 주기, 최소 생활을 유지할 비용을 제외한 재산을 여성단체에 기부했던 것들이 그것입니다.선생님은 분단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눌리고 차별받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살았던 여성 등 소외된 이들과 함께했던 여성운동가로서, 한국사회 가부장제의 뿌리를 찾아서 연구한 학자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욕심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시대의 ‘참 스승 모델’이었던 선생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벌써 그립습니다! 이제 선생님과 이별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그 길 열심히 따라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제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편히 가십시오.

 

강인순/ 경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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