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미라보 다리 아래…” 황현산의 번역을 친구는 왜 타박했을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10. 07:09

“미라보 다리 아래…” 황현산의 번역을 친구는 왜 타박했을까?

등록 :2020-10-09 05:00수정 :2020-10-09 10:08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황현산 지음/난다·1만4000원

 

<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는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1945~2018·사진)이 2012년에서 2017년까지 문예지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유고집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고인은 “논문도 비평도 아닌 글, 양쪽 모두이면서 어느 쪽도 아닌 글”을 써 보고 싶다고 밝혔거니와, 이 글들은 논문과 비평의 성격을 지닌 에세이에 가까워 보인다. 국내외 시들에 관한 진지한 논의에 글쓴이의 개인사와 회고담이 무람없이 섞여 드는 모습이 오히려 친근하고 반갑다.

 

예컨대 ‘아름다운 문학청년 최하림’이라는 글을 보자. 이 글에서 황현산은 1960년대 초 자신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직 대학생이던 최하림이 심사를 맡은 백일장에서 입선했던 일, 그로부터 한참 뒤 그의 1998년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 시인의 부탁으로 해설을 썼던 일 등을 회고한다. 백석을 다룬 글에서는 재·월북 문인들이 금기에 묶여 있던 1979년 그의 시집 <사슴>을 몇 번에 걸쳐 거듭 복사한 열악한 판본으로 처음 접했던 경험이 소개된다.

 

평론에 못지않게 번역에도 열심이었던 황현산이 자신의 번역을 예로 들어 가며 펼치는 번역 이야기도 흥미롭다. 잘 알려진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경우다. 이 작품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53년이었다. 장만영 옮김으로 <불란서시선>(정양사)에 실린 이 시 앞 두 연은 이러하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이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괴로움에 이어서 맞을 보람을/ 나는 또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해도 저무렴. 종도 울리렴./ 세월은 흐르고 나는 취한다.” 이 번역을 황현산 자신의 2010년 번역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보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문법적으로나 시의 주제로 보나 황현산의 번역이 원작에 더 가까울 테지만, 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어느 시인이 실망 섞어서 내놓았다는 촌평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전문가의 번역이라는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니군.” 아마도 일본 번역을 크게 참조했을 장만영 번역본의 유려한 가락과 감상적 정조가 오래 신은 신발처럼 편안하고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밖에도 이육사의 이른바 ‘안 좋은 시’들에 대한 적극적·호의적 재해석, 이른 죽음을 맞은 박서원 시인의 “고결한 재능”에 대한 안타까움, 그 자신 섬 출신으로서 정현종 시 ‘섬’을 대하는 양가적 감정 등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