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사흘’ 소동이 불러온 위기감…한국어를 지켜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10. 07:56

‘사흘’ 소동이 불러온 위기감…한국어를 지켜라

등록 :2020-10-09 04:59수정 :2020-10-09 12:11

 

[책과생각] 한국어에 날개를 달아라


우리말글이 관통한 역사 소개하고 더 풍성한 언어 모색하는 책
외래어·외계어 ‘훼손’의 관점 아닌 다양성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

백낙청, 임형택, 정승철, 최경봉 지음/창비·1만6000원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

박일환 지음/뿌리와이파리·1만6000원

 

나라말이 사라진 날

정재환 지음/생각정원·1만5000원

 

한글의 감정

조현용 지음/한글파크·1만3000원

 

‘사흘간 황금연휴’. 이 반가운 소식이 순식간에 논란으로 비화됐다. ‘사흘’ 때문이었다. 사흘은 ‘세 날’을 뜻하는 순우리말.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단어에서 사(四)를 연상하면서 휴일이 3일이냐 4일이냐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빚어진 것이다. 소동은 하루 만에 잠잠해졌지만 이 소동이 몰고 온 위기감은 상당하다. 사흘을 모를 정도로 한국어에 대한 언중의 무지가 심각한 수준인가.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소통을 되레 방해하는 현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574돌 한글날을 맞아 이 같은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소개한다.

 

_______

과도한 언어 규범화가 말을 메마르게 해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은 한국어가 관통한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말을 더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공동의 자산으로 가꿔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한 책이다. 고전 연구자이자 한문학자 임형택,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백낙청, 국어학 전문가 정승철(방언학)·최경봉(국어사전학)이 7시간에 걸쳐 토론한 결과물을 담았다.

 

토론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글은 1443년 창제됐지만 그로부터 400여 년이 흐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언중에 널리 쓰였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근대 한국어의 기점을 병자수호조약(1876) 이후로 짚으면서, 한국어가 짊어진 ‘근대의 이중과제’로 논의의 문을 연다. “(…) 이전부터 어떤 준비가 있었지만 강제편입의 경험을 계기로 더욱 분발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근대에 적응하는 한편 동시에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이 우리 역사에 왔는데 한국어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1907년 설립된 국문연구소는 그 일환이다. 국가가 국어 규범을 만들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기관인 이곳에서 주시경, 지석영, 이능화 등은 국문 표기의 기초를 마련했다. 한글 창제 이후 200∼300년 후까지 “글자마다 같지 않고, 사람마다 다르게 썼던” 문제가 지속됐는데, 국문연구소가 고안한 ‘형태주의 철자법’(말의 형태를 고정적으로 밝히는 방식) 덕에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것이다. 이 국어 규범은 이후 조선총독부가 내놓은 표음주의적(‘꽃이’를 ‘꼬치’로 적듯, 발음 나는 대로 적는 방식) 표기법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이자 대안이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언어 규범화’는 해방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과도한 국어순화정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정승철은 새마을운동의 과제 중 하나로 ‘고운말쓰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사투리가 추방 대상으로 포함됐고, 이것이 사투리에 모멸감을 안기면서 언어다양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최경봉은 1960∼1970년대에 외래어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국어순화운동은 언어의 소통 문제보다도 언어를 통해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면에서 ‘퇴행’이었다고 꼬집었다. 언어 규범화의 정수인 ‘표준어’가, 표준어가 아닌 것을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음으로써 한국어라는 저수지가 메마르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바짝 마른 저수지에 쏟아지는 외래어와 ‘외계어’(한글 문법을 뛰어넘어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줄임말이나 조어로, 주로 10∼20대가 사용하는 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최경봉은 고유어로만 구성된 완벽한 한국어는 존재하지 않기에, 외래어가 한국어를 ‘훼손’한다는 식이 아닌 ‘풍부하게 한다’는 측면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원칙적으로 된소리를 배제하는 표기법 역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영어에서 된소리를 쓰지 않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 대미의존, 영어존중사상이 지나치며 (…) 외국어의 속성을 알고 원음주의를 주장할 필요도 있다”(백낙청)는 것이다.

 

때로 세대 간 소통의 벽이 되기도 하는 신조어에 대해서도 토론자 다수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예컨대 ‘개’라는 접두사는 중장년층에게는 나쁜 쪽으로 심함을 뜻하지만(개고생), 청년층에게는 그 반대(개이득)로 쓰이는 등 의미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에 대해 정승철은 “하나의 언어공동체라는 세계는 실현될 수 없다. 소통은 세대·계층별 다양한 공동체 속 중간집단의 매개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국가를 하나의 언어공동체로 보고 지나친 언어 간섭을 하는 건 되레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백낙청은 ‘코먼스’(commons)라는 관점에서 외래어·신조어 범람의 문제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인간의 창조성과 능동성이 작용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물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비물질적인 실체도 아닌 영역”을 코먼스(공동영역)라고 명명하면서, 한국어라는 공동영역에 유입되는 새로운 단어들이 이 영역을 활기차고 풍부하게 하는지, 아니면 파괴하고 파편화하는지를 따져 수용 여부를 판별하자는 것이다. 한문학, 영문학, 방언학, 사전학 등 서로 다른 물줄기에서 흘러온 의견들이 논의의 깊이를 더하면서도, ‘다양성을 위해 언어 규범화의 강도를 낮춰야 하고, ‘한국어’라는 공동영역을 가꿔나가는 주체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의 책임감도 요구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레 모여들어 독자에게 과도한 고민을 지우지 않는 책이다.

_______

더 풍요롭고 활기찬 말글살이를 위하여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30년 동안 국어 교사를 지낸 박일환이 쓴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는 과도한 언어 규범화가 낳은 허점과 오류를 깐깐하게 잡아낸 ‘국어사전의 오류사전’이라 할 만한 책이다. 지은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다수 언중이 사용하는 ‘과메기’(청어나 꽁치를 차게 말린 것)는 방언으로, 반대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신후리’(고등어를 잡을 때 쓰는 후릿그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쓴다)는 표제어로 올라가 있다는 등의 실례를 제시하면서 “특정 지역에서 주로 쓰던 말이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도 알아듣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으면 모두 표준어의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또 ‘클랙슨’(klaxon·경적)처럼, 언중의 발음과 너무나 다른 외래어 표기법 문제, ‘일기병’(일생 동안 낫지 않는 병)처럼 일본에서 들어왔으나 더 이상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여전히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비표준어로 몰아낸 말들을 끌어안을 때 우리말이 더 풍부해지고 말글살이의 영역도 넓어질 것이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정재환이 1942년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 전후를 마치 소설처럼 몰입감 있게 써 내려간 책이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절박함으로 조선어사전을 펴내려던 회원들은 일제 치하 경찰에 ‘내란죄’ 혐의를 받아 체포되고, 이 가운데 2명이 옥중에서 사망한다. 지은이는 이 비극이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고등학생 박영희의 평범한 일기 한 줄에서 시작됐음을 전하면서 한국어가 사라진 어제를 통해 한국어가 살아 있는 오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글의 감정>은 오감을 활짝 열고 한국어를 ‘느끼도록’ 돕는 책이다. 경희대 한국어교육과 교수인 지은이 조현용은 한글과 소리, 촉감을 연결시켰다. 예컨대 니은에서 노랑과 날(태양)을 연상해 나가면서 “니은은 따뜻하면서도 오래 계속되는 느낌을 보여주는 소리다”라고 한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에 온갖 이야기와 감각을 동원하는 글쓴이의 태도에서 진한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