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공명정대하고 창조적 언론 추구한 고결한 선구자였죠”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14. 03:38

“공명정대하고 창조적 언론 추구한 고결한 선구자였죠”

등록 :2020-10-13 17:23수정 :2020-10-14 02:38

 

70년대 언론자유 되찾으려 고난의 길
80년 수배 끝에 남영동 고초 옥고까지
어떤 상황에도 ‘존엄’ 잃지 않고 당당
‘국민주신문’ 담대한 발상 ‘한겨레’ 탄생

만년에 철저한 고독 속 구도자 삶
안식·평화·천상의 행복 누리시길

 

[가신이의 발자취]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보내며

 

13일 오후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조문객이 찾아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정태기 선생 하면 많은 분이 금방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와 한겨레신문을 떠올릴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는 조선투위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 주역을 담당한 사람이며, 한겨레신문의 탄생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일보>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있는 사실을 없는 사실’로, ‘큰 사건을 작은 사건’으로,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이런 언론을 바로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런 신문을 계속 만드는 것은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탈당한 언론자유를 되찾아 진짜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기자협회 조선일보분회장을 맡아 언론자유수호투쟁을 이끌었습니다. 후배들이 그에게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참 오래 오래 좋은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라고 하면서 처연한 표정으로 수락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투쟁이 어떤 고난을 가져올 것이고 동료들에게 어떤 희생을 가져올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명문 엘리트 코스를 거친 매우 뛰어난 기자였는데, 그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투쟁을 이끌면서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사주와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치열한 결전에 나서 6일 간에 걸친 대대적인 제작거부 농성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32명의 기자들이 파면당하는 고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초대 조선투위 위원장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실업자가 된 수많은 동료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져야했습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데 몸을 피할 곳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의 고난은 계속되어 사회혼란을 조장했다 하여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었으며, 1980년엔 오랜 수배생활 끝에 체포되어 악명 높은 남영동에서 고초를 겪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면회소에서 그를 만나곤 했는데, 그 살벌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당당했으며, 기품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진짜 사람의 ‘자존’(自尊)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아주 높은 곳에 두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냈으며, 그 존엄 때문에 어떤 부끄러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가 쩨쩨하게 행동하는 것을 본적이 없으며, 그를 통해 인간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1987년 7월로 기억합니다. 6월항쟁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였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 갔습니다. 갔더니 대뜸 하는 말이 국민 모금으로 신문사를 하나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오랜 꿈 아니냐,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담대한 제안에 많이 놀랐습니다. ‘국민모금에 의한 새 언론 창설’은 1979년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에 의해, 1985년 3월 조선투위의 성명을 통해, 그리고 그해 6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말> 창간호를 통해 제시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직언론인들의 머리 속에만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벅찬 일이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것을 실행에 옮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언론 암흑시대를 겪으며 참된 언론을 갈망해온 해직언론인들과 수많은 국민들의 염원이 뭉처져 탄생한 것이지만, 그 염원을 현실로 만드는 데 첫 디딤돌을 놓은 것은 정태기 선생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던들 한겨레신문의 탄생은 아직도 우리의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조선투위 동료들과 동아투위의 동지들을 자신의 사무실에 초대하여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설득했습니다. 잘 진행되던 모금운동이 50억 원에 이르러 정돈상태에 빠지자 모두 큰 위기를 느꼈는데, 그때에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놀라웠습니다. 그는 언젠가 “한겨레신문은 해직언론인들과 수많은 국민들의 염력(念力)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염력을 믿었던 것일까요?

 

그가 한겨레신문의 사장이었을 때 나는 그의 언론관과 한국 언론이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참신한 구상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가 추구한 언론은 오늘 같은 더럽고 추악한 언론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자사의 이익과 특권을 추구하면서 정파적 프로파간다를 일삼는 편협하고 옹졸한 언론이 아닙니다. 공명정대한 언론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신앙의 대상처럼 섬기며 아주 높은 차원에서 ‘냉엄한 이성의 눈’으로 현실을 들여다보고 판단하며 올바른 시대정신을 찾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창조적 언론’이었습니다.

 

만년의 정태기 선생은 세상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한 채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철저한 고독 속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하고 탐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마침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 그리고 세상에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는지 듣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마도 큰 깨달음을 얻어 그토록 추구했던 ‘대 자유‘를 얻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아무쪼록 영원한 안식과 평화 속에서 천상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신홍범/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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