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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앎의 출발, 위치성 [정희진의 융합 _11]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25. 05:54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앎의 출발, 위치성

등록 :2020-11-23 16:42수정 :2020-11-24 02:38

 

정희진의 융합 _11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나는 어디에 있는가’ 위치성 자각

만물은 나를 통과해 인식되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

누구나 부분적인 위치에서

세상과 만날 뿐포지션은 자각과 지속적인 이동

 

베넷 밀러 감독의 미국 영화 <머니볼>은 최고의 스포츠 영화, 최고의 야구 영화 그리고 내게는 ‘인생의 영화’다. 2011년 제작된 실화다. 동료가 1루수에게 묻는다. “너는 언제 제일 무서워?” “공이 내게로 올 때” 동료는 농담 말라며 다시 묻는다. “진짜야…”. 그의 자신 없는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야구에서 1루수는 공이 가장 많이 오가는 포지션이다. 야구 인생의 끝자락에서 가난한 구단에 겨우 입단한 그에게 ‘1루수’는 경기장에서의 포지션을 넘어 생계와 운명이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나 1루수인 것은 아니다. 그의 포지션은 다양할 수 있다. 백인이지만 흑인의 입장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민일 수도 있다.

 

내가 많이 권하는 책, <가만한 당신>의 저자 최윤필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한다. “(…) 요컨대, 나는 국적·지역·성·젠더·학력 차별의 양지에 살았다. (…) 그러나 나는 노력 중이다.” <머니볼>의 1루수는 자신의 포지션(position)을 확실히 알고 있어서 불안하다. 최윤필은 한국 사회에서 주류로 간주되기 쉬운 본인의 위치성을 알고(positioning), 자기 글의 부분성을 분명히 밝힌다. 두 경우 모두 포지션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조감도, 착각과 욕망

 

야구 경기의 원리를 알아야 1루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듯, 사회구조를 알아야 자신의 위치(social position)를 알 수 있다. 위치는 ‘지도’(사회)를 전제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사회인지 알아야 한다. 앎은 구조 속에서 자기 자리를 인지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말, “나는 누구인가”는 자신을 알 수 없는 첫 번째 질문이다. ‘면벽’(面壁)만으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한 다음에 가능한 질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 포지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 전체, 과학, 중립 등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성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이것이 소위, ‘모순’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성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론이다.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말의 의미가 달라지고 이것이 곧 ‘권력과 지식’의 문제로 이어지는 일상적 사례 중 ‘조감도’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 밖을 볼 수 없다. 또한 새의 위치 즉 누구도 건물 위에서는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다 볼 수 있다”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는 ‘남성’의 조감(鳥瞰, birds eye view)에의 착각과 욕망은 끝이 없다. 백인은 자신이 새, 조물주,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고, 비서구의 식민지 지식인은 그러지 못해 안달이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 드론으로 건물은 볼 수 있겠지만, 인간과 사회현상은 볼 수 없다. 건물을 놓고 어느 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건물의 모습은 각기 다르며, 우리가 본 모습은 모두 일부분이다. 자기 인식이 부분적(partial)이라는 진리, 즉 각자의 당파성(partiality)을 인정해야 한다.

 

부분적 지식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성찰적 지식이다. 지식의 구성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 경합의 과정이다. 자기 위치성을 인식한 사람만이 당파성과 보편성이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논쟁에서 ‘이기는’ 첩경은, 자기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모두 파악할 때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걸작인 이유는 그의 위치성 때문이다. 그는 까마귀(일제)가 아니라 새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아해들’과 자신을 동일시(포지셔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남성의 목소리가 초월적, 보편성, 객관성을 갖는 것은 ‘친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는 1934년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30편 연재가 예정되었다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편에서 중단되었다. 이상의 시를 계속 게재하기 위한 이태준의 결사적인 노력은 유명한 일화다. 역사는 독자의 수준에 달려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인간관계나 여야 간 아니 ‘장관과 총장’의 갈등을 지켜볼 때, 의사소통 문제로 미쳐 버릴(?) 때가 있다. 평소 내가 하고 싶은 말(상대의 단점)을, 상대가 나에게 하는 경우다. 내가 참고 참았던 말을 상대가 말할 때! 더구나 상대가 나보다 ‘갑’이거나 ‘정신승리’ 타입일 때는, 억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인생고의 본질은 말이 안 통하는 세상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제 그만 용서할 때”라고 설교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누워 있는 이에게 “(너무 많이 걷지 말고) 잠시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며칠 굶은 사람에게 식사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사람, 돈이 없고 기회가 없어 고통받는 상황을 청춘의 특권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럴 때, 우리는 외쳐야 한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나의 위치성에서 생각한다.” 이는 “네 주제(능력, 형편, 조건…)를 파악하라”,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진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다.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기득권자나 사회적 약자 모두 자기 위치성을 아는 과정은 쉽지 않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혼란, 안 보이던 세상이 드러나는 놀라움과 두려움, 지적 호기심… 자기를 아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미로를 헤매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자신을 남성과 동일시해온 여성이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여성’으로 ‘취급’되어 왔음을 자각하는 순간, 정체성의 정치라는 복잡하고 고단한 일상이 시작된다. 자기 위치성에서 주류와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성별에 그치지 않는다. ‘유색인종’, 장애인, 성소수자의 자각 역시 각자의 경로를 거친다.

 

그렇다고 여성이 모두 같은가? 그렇지 않다. 여성은 나이와 계급 등 수많은 기준에 따라 다시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내가 미국 여성과 이야기할 때는 ‘한국인’으로서 위치성을 가지지만, 한국의 이주여성 노동자와 연대할 때는 ‘여성’으로서 위치성을 갖는다. 이처럼 위치성은 ‘놓여진’ 현실임과 동시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사회, 인간관계,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 쉽지 않은 포지션이다. 이들은 남성 사회에서도 여성에게도 배척당하기 쉽다. 그래서 R. W. 코넬 같은 남성성 연구자는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하기도 했다. 다른 성별의 몸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만큼 성별은 역지사지가 어려운 사회적 모순이다. 자신의 자리(地)가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 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억압 세력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포지션은 무엇인가요?”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실상 자기 커뮤니티로의 커밍 인(coming in)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집(홈)은 안전한가? 집(부동산)이 있는가? 집에서는 침방울이 안 튀나? 탈코르셋(외모주의 반대운동), 이 운동은 백번 옳지만 중년 여성, 장애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같은 의미를 가질까. 지독한 위치성, 이것이 앎의 본질이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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