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신의 성품 [봉서방]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4. 18. 02:51

신의 성품

봉서방* 추천 0 조회 80 21.02.03 02:41 댓글 4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s://cafe.daum.net/cgsbong/20g7/62296?svc=cafeapiURL복사

 

신의 성품

신의 성품에 참예하자(벧후 1:1-1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 후1:4-11)

들어가는 말

책을 읽고 보는 것은 나의 주관적이 아니라 지은이의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지은이가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알아갈 때 비로소 읽는다, 또는 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베드로는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또 모여서 성도들의 교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것은 값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모로 되어진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동일한 보배의 값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분과 모든 것이 다르더라도 그 믿는 믿음은 똑 같다고 합니다. 그 똑같은 믿음의 시작은 의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로 나오지만 원문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의 안에서’입니다. 의란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사람의 의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이 의는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들이 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은 의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이 동일한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동일함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과 생명과 경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을 부르신 이를 아는 자들입니다. ‘신기한 능력이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신적, 신격, 신의’의 뜻입니다. 신의 능력 안에서 생명과 경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을 부르신 이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큰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4)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에 이끌러서 그만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썩어질 것으로부터 나와서 이제는 신의 본성에 참예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일을 버리고 신의 본성에 서로 교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 안에서 보배롭고 동일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끝은 신의 본성 즉 신의 인격과 성품이 나옵니다.

2.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 1:5)

“덕”은 ‘어진 행위’로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보고 덕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덕을 행하는 자는 거룩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제사장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나온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생의 어두움에서 살다가 빠져나와 사는 것이 곧 덕을 행하는 삶입니다. 신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덕을 행하신 분입니다. 어두움에게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던 백성들을 복음으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생명의 빛 안으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갈 길을 모르고 있는 자들을 복음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리게 하는 것이 덕목의 삶입니다. 이 일을 하고자 우리는 항상 몸가짐과 언행을 삼가 조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고자 하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없이는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지식은 배움이며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는가에 따라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에서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생명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사람 앞에서 인정받으며 덕을 세우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지식은 사람들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외면합니다. 오르지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지식이 충만해서 생명의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절제와 인내입니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 1:6)

생명의 지식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요즈음은 콩나물을 키우는데 빨리 크는 호르몬제를 투여하여 물을 주어 속성으로 키운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 몸에는 안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빨리 키워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항상 절제가 필요합니다. 보약도 과하면 몸에 해롭듯이 생명의 지식도 상대방에 따라 서로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안다하여 함부로 남에게 말해도 안됩니다. 받을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절제하는 신앙의 삶이었습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산으로 혼자 가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신의 성품의 모습입니다.

3. 인내와 경건입니다..

절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의 성품으로 자란다는 것, 서로 서로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내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믿는 자들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인내하는 동안 확실한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동기 부여가 없는 신앙 생활은 힘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우리가 인내 하는 것은 선한 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결실하기 위해서입니다. 들판에 있는 생명들은 때를 따라 싹을 띄워 하늘을 향합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자신들의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나는 열매를 맺지 않을거야!” 하면 그것은 바보가 하는 말입니다.

이 나무들은 긴 여름을 지나는 중 태풍이 옵니다. 한 낮에는 30도가 넘는 태양 빛을 받습니다. 벌레들이 와서 자신들의 몸을 괴롭힙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때를 따라 꽃을 피우고 지면서 열매를 맺힙니다.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 비로소 또하나의 열매가 맺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의 그늘속에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수 뽑아 내셨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들에게 애굽의 종 살이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고자 함이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교제, 신의 성품으로 살아가게 함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이 목적을 배반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통과해야 할 광야에서 그만 원망과 불평과 하나님을 대적하며 시험하는 일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늘 괴롭혔습니다. 이들은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오는 환경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내시고 교회에서 만나게 하신 것은 신의 성품으로 열매를 맺어 서로 사랑과 생명과 거룩의 열매로 맺어가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인내는 말씀으로 늘 채워져가는 인내입니다. 신앙 생활은 년수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무엇이 채워져 가느냐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직분과 년수를 자랑하지 말고 생명이 자신안에 채워짐에 감사와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10) 하나님의 본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을 보고 맹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떠서 신의 성품으로 열매를 맺어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행실이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