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다산을 알려준 역사적 문헌(文獻)[박석무]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5. 31. 10:30

제 1165 회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을 알려준 역사적 문헌(文獻)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데 증거가 되는 자료나 기록을 ‘문헌(文獻)’이라고 말합니다. 문헌이 없고서야 어떻게 옛일을 알며, 지나간 시절에 대한 실상을 파악할 방법이 있겠는가요. 그런 의미에서 문헌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다산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지니고 온갖 서적과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지가 오래되었지만, 저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값지게 여기는 문헌이 있는데, 오늘은 그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다산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자료라고 권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의 소제목만 보아도 다산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글인가를 금방 알게 됩니다.「다산선생의 일생」을 4개 분야로 설명합니다. ‘다산초년과 그 시대의 학술경향’이라 하여 다산이 태어나던 시절의 조선의 학계 동향을 알기 쉽게 설명합니다. 유형원·이익 등의 학문이 조선의 학문 경향을 바꿔 놓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살피면서 다산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석학굉식(碩學宏識)을 보성(輔成)하던 가지가지’라는 제목으로 다산이 영향을 받은 반계·성호의 학문과 친가와 외가쪽의 축적된 학문이 다산을 키워주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 항목에서 반계·성호·다산이 조선 근고의 학술사에서 일조·이조·삼조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명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저의 증조부 민재(敏齋:朴琳相)공은 바로 송사 기우만선생의 친자(親炙)문인으로 의병에도 참여했던 학자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오래전부터 고산서원의 원장이라는 과분한 책임을 맡아왔습니다. 그런 책임 때문에 큰 행사는 치르지 못하고, 간략한 고유제로 대신하기 위해 고산서원을 방문했습니다.

‘주우(主遇)는 화태(禍胎)요 학풍은 살기(殺機)’라는 제목에서는 정조의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도 화란은 키워졌고 다산의 실사구시적 학문 경향은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불행의 단초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그의 힘들고 불행했던 유배생활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불행과 고통 속에서 위대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로 성장했음을 알리려고, ‘신익궁(身益窮) 학익정(學益精)한 그의 半生’의 제목으로 몸이 궁함에 빠질수록 더욱 학문은 정밀하고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역시 정인보는 한말에서 해방전후 사이, 조선 최고의 한학자이자 국학자였음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글이 바로 그 글이었습니다.

위당의 다산학문에 대한 간단한 평가는 참으로 고전이기에 충분합니다. “조선 5천 년간 둘도 없는 대저를 남겼다. 그 모든 저술은 ‘物 은 그 實을 求하고 事는 그 實을 考한다’는 것이 중심이 되어가지고는 一言一句가 民과 國의 실익을 圖하는 이외에 번짐이 없게 하였다.”라고 말하여 다산의 학문은 실구 실고한 학문, 바로 실사구시의 학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민과 국, 백성과 나라에 실익을 추구한 실학의 학문임을 다시 강조해주고 있으니 다산의 전모가 위당의 글에서 드러납니다. ‘일생’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종합해서 읽으면 다산연구의 길잡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위당의 업적이 그렇게 큼을 또 거기에서 느끼게 됩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