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보내는 아픔, 남아 있는 부끄러움- 수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2. 5. 17. 07:14
보내는 아픔, 남아 있는 부끄러움- 수필
은혜추천 0조회 8322.02.28 11:3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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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보내는 아픔, 남아있는 부끄러움


나와 아내는 둘이 사는데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완전히 대전에 안착한 때가 1985년이었는데 그때 자녀들은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고 또 학위를 마치고는 거기 남아 직장을 갖고 있어서 우리 둘은 얼굴만 바라보고 살고 있었다. 3남 1녀였는데 남들은 명절에 손자들을 본는 것이 기쁨이라는데 우리는 그러지도 못했다. 다행히 형제들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어서 봄·가을에 모란공원의 부모님 묘소를 찾아 형제 가족끼리 추도예배 드리고 회식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후에 딸 내외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자 가끔 그들을 만나는 것이 낙이었다.
다행히 세 아들은 미국에 있어 내가 방학에는 도미해서 그 가정들을 돌아보는 것이 그래도 즐거움이었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흩어져 있는 세 아들을 다 만나보려면 국내선 비행기를 예약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자 열세 시간 이상을 타야 하는 국제 여행도 힘들게 되었다. 가뜩이나 아내가 대퇴골(넓적다리뼈) 골절로 걸음을 잘못 걷게 되자 여행이 어려워지고 더구나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이 쉽지 않았다. 2020년에는 너무 오래 자녀들과 헤어져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자녀들을 보러 가겠다고 3월 출국, 5월 입국하는 비행기 표를 6개월 전에 예약해 두었는데 갑자기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 900명대가 되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짐을 싸서 현관에 내놓고 미화 교환을 하러 은행에 나가려는데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미국에 코로나 만연으로 안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그래서 지난해는 가지 못했다. 2021년 11월 24일부터 2022년 2월 23일까지 다시 국제선 왕복을 예약했다. 그때까지는 좋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코로나는 잠잠해지지 않고 4,000명대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미국은 자가격리도 없고 또 설령 자가격리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애들 집에 거의 머물러 있을 것이므로 그냥 떠나기로 했다. 나이가 많아져 이제는 해외여행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둘째 아들은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한국에 나와서 우리와 동행했다. 이번은 5년 만의 여행이었다. 인천에서 직항으로 댈러스까지 가서 막내아들 집에 있다가 새로 직장을 옮긴 둘째 아들 집이 있는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서 한 달 때쯤 보내고 다시 댈러스로 돌아왔다. 여기서 보스턴에 있는 아들 가족과 한국에 있는 딸 가족까지 다 만나볼 생각이었다. 댈러스는 내가 장로로 장립한 한인교회도 있고 내가 학위를 받은 곳이어서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우리 자·외손은 증손녀까지 24명인데 한국의 사위만 빼고, 다 모였다. 그날이 1월 16일이었다. 24(월)일에 출국을 앞두고 pcr 검사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오미크론 확산으로 확진자가 8천 명대가 되어 평소는 출발 72시간 전에 하던 검사가 42시간으로 단축되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틀 전 토요일에 검사를 받았는데 휴일이 끼어 출발 전날 밤 11시에 겨우 음성판정을 받는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 시각에 내 셋째 동생 오근재가 한국 시각 23일 오후 3시 36분 운명했다는 카톡이었다. 발인예배는 15일 오전 7시 30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미국시각 24일 오전 출발이었지만, 한국 도착은 한국 시각 25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평소에 내 큰 의지가 되었던 동생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나는 그 유골도 만져보지 못할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해외 입국자는 공항에서부터 자가격리 앱을 핸드폰에 깔아주고 입국 24시간 이내에 PCR 검사를 하고 음성인 경우,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전 10시, 오후 8시에 체온 검사를 해서 앱에 올리고 외출을 금하며 자가격리 상자에 음식물도 열흘 동안 버리지 말고 집에 보관하라고 쓰레기 모아놓는 노란 봉지까지 주는 것이었다. 내 격리가 문제가 아니었고 내 동생을 이런 경우에 그렇게 보내는 아픔이 너무 컸다.
내 첫째 동생 오영재도 이북에서 2011년 11월에 갑상선암으로 사망했다. 그때도 NK chosun을 통해 사망 소식을 보았을 뿐 방문은커녕 전화도 위로의 편지도 보낼 수 없는 가깝고도 먼 땅에서 내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었다. 그런데 내 셋째 동생을 또 이렇게 보내는 아픔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20여 년 전 무슨 암의 증후가 보인다고 서울대 병원에서 표적항암제로 개발된 글리백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약을 끊어도 될 것 같다면서 3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라고 해서 아주 의욕을 가지고 운동도 하며 음식 섭취도 잘해서 퍽 좋아 보였었다. 지난해 10월 4일에는 내 둘째 동생 가정에 우환이 있다고 대만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그 집 딸 내외가 귀국한 일이 있었다. 내 제수씨(근재의 형수)가 림프종 혈액암 판정을 받은 데다 그의 형도 담낭에 문제가 있어 암 검사를 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 그것은 우리 온 가족의 기도 제목이었다. 당시 내 동생 근재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서울 형네 집까지 운전하고 가서 이 가정을 위해 기도를 해 주고 귀가했다. 그는 이런 병을 하나님 아니고는 치유해 줄 분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11월 한국을 떠나면서도 둘째 동생이 걱정되었지 셋째 동생은 걱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떠날 때 언제 오느냐고 묻는 제수씨 목소리가 좀 걱정이 되었을 뿐이었다. 후에 들었지만, 그때 서울대 병원에서는 암이 췌장 쪽으로 전이 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라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호스피스 병동에 옮기면 코로나로 가족 한 사람밖에 병실에 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면회도 되지 않아 동생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생의 딸 내외가 급히 내한했었는데 동생이 떠날 때는 그의 아들 내외와 생존해 있는 형제 내외의 문상을 받고 쓸쓸하게 세상을 마친 바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가훈은 정직, 성실이었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부터 가족들에게 지키자고 정한 가훈이었다. 하나님을 알면서부터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주 앞에 “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서약했다면 꼭 그대로 사는 성미였다. 제자들이 명절에 선물을 보내면 가져온 자에게 도로 돌려보냈고 택배는 반품하는 성미였다. 나는 나이가 많아져서 인터넷쇼핑으로 음식물을 사 먹는 터여서 좋은 것이 있으면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꼭 무엇인가를 되돌려 주었다. 나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도 약값이 꽤 들 것 같아 그에게 좀 송금하면 다시 돌려보냈다. 나는 말했다. “사랑은 받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님께 돌려줄 생각인가?”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이 되는 것이다. 받은 사랑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안 되는 사람이다.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그 교회의 목사는 장로들의 농간으로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는 그 뒤로 40년 넘게 12개 이상의 교회를 편력하면서 참 기독교인이 모이는 교회를 찾았던 사람이다. 그는 한때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을 싫어하였다. 그는 교회에 모여 율법과 교회의 인습적인 신앙과 신조를 충실하게 지키며 “믿습니다.”,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경쟁하며 싸우며 모함하며 오히려 세상에 집착하여 성공을 찾고 있는 속된 인간상을 볼 수 있어서였다. 근본적으로 그는 인간의 이면에는 모순되는 두 가지 인간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2019년 5월 『배다골』이라는 책을 썼다. 요한복음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천상에서 온, 디두모, 도마와 클라라(일찍 세상을 뜬, 추방단한 목사의 처제)를 만나 꼬박 3일 동안 요한복음을 두고 깊이 토론한 내용을 쓴 책이 『배다골』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김회권 목사는 『배다골』을 ‘고백문학으로서의 <소설 요한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동생을 만나면 기독교 신도로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는 참다운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하면서 기독교인의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람이다. 인간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유물론적 관점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영원의 천국을 사모하는 관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지고 세상에 살고 있으면 유물론적이고 실증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어서 이를 버리지 않으면 영원과 믿음의 세계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는 사도, 도마 뒤에 숨어 있는 쌍둥이 도마를 본다. 도마 뒤에는 언제나 천국을 향한 도마와 세상을 향한 도마, 이 두 쌍둥이가 있다. 3일 동안 도마와 요한복은을 심도 있게 토론한 뒤 헤어지면서 도마가 고백한다.
“디두모 도마, 바로 쌍둥이에 대한 감출 길 없는 제 모습입니다. 저는 압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각자의 자기 속에는 두 개의 자신의 모습이 마치 쌍둥이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갈릴리호반 주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이심을 믿고 제 모든 생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의 기록에 불과할 뿐, 그렇게 결심할 때까지 제 가슴 속의 갈등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의 나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또 하나의 나는 그냥 어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덜 고단한 삶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베드로 님 속에도 두 명의 베드로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가야바의 정원에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그분 속에는 스승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베드로와 그분을 부인하여 우선 삶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스스로 부추기고 있는 또 하나의 베드로 말입니다. 이러한 보기는 오 집사님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러므로 저만이 디두모 도마가 아니라 이 세상의 신자들은 모두 저와 같은 이름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동생은 참 신자라고 자부하는 자기 뒤에 두 개의 상반된 쌍둥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는 김회권 목사가 시무하는 <가향교회>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세상에서 학문을 쌓아 신학 박사를 한 사람이 강단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르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다. 믿음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지식이 쌓여서 존재의 합법적, 논리적, 객관적 이론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이성을 초월하는 영원의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을 단번에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인간은 결국 유한하고 기독교인이 바라보는 천국은 초 경험적이며 합리성과 실증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믿음의 세계이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본을 받음으로 그가 분부한 걸 가르쳐 지키게 하고 드디어는 부활한 성자와 하나가 되어 영원한 천국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을 믿는 일이다.
또한, 그는 미술학도이면서 수학자인 나를 부끄럽게 한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 율법을 순종해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은 유리수로 무리수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제곱근 2'는 무리수로, 유리수로는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1.414, …1.4142135623… 등. 소수 이하 4자리, 또는 10자리로 끝내는 유리수로는 무리수에 가까이 갈 뿐 무리수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유한한 존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한한 존재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유한한 인간은 무익한 종의 고백처럼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주인께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세속적인 인간으로 산 자신의 겸손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천국에 계시고 우리는 유한한 지상에 있어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세상에 계시던 예수님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다. 고난을 인내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고 살면 그것이 지상에 천국을 확장하며 사는 삶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론이 세상과 타협하는 다른 한쪽의 도마라고 증오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를 속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정직과 성실로 하나님을 독대하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갔다. 그가 마지막 병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실내 온도를 30도로 하고 살았으며 매일 심한 통증을 이기기 위해 10,000mg이 되는 아스피린 주사를 맞고 지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심을 보고 그 고통을 덜하게 하시려고 좀 더 일찍 부르신 것 같다.
“동생이여! 그곳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네. 어제와 오늘과 내일 같은 시간도 없는 영원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하나님의 품에 안겨 편히 안식하게.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파 괴로워하는 고통이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편히 쉬시게. 이것이 보내는 나의 아픔이고 살아남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해서 부끄러워하는 바네.”
2022년 4월 5일 장로문학 27호 게재


1933년 전남 담양군 출생.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등단. 소설집으로 『아시아제』, 『개구리 왕국』,
 
『신 없는 신 앞에』, 『급매물 교회』,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오승재 문집 『토기장이가 빚은 질그릇 1~5』 신앙 간증집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예수님』 등 10여 권. 기타 저서로 『지지 않은 태양 인돈』,(전기), 『한국 선교 이야기』,(역서) 등 있음.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상, 창조문예 문학상 등 수상. 한남대학교를 거쳐 미국 북텍사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한남대학교 은퇴 후 대학 이사 역임. 현재는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고문, 한국장로문인회 고문, 창조문예 편집고문으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