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국민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장로신문 특별기고>

성령충만땅에천국 2022. 6. 11. 16:06
국민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장로신문 특별기고>
 
국민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국민의 뜻, 국민의 목소리를 분별해 듣고 국민에게 충성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너무 목소리가 다양하고 집단 이기적이어서 분별하고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분노한 군중이 길거리에 나와 외치면 거기서 어떤 뜻을 찾아낼 것인가? 군중의 목소리는 그중 가장 저급한 지능 집단의 목소리라는 말도 있다. 지상의 음성이 아니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갑자기 러시아의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의 볼로드미르 젤린스키 대통령은 그때 무슨 음성을 들었을까? 러시아의 표적 1순위가 대통령, 2순위가 그 가족이어서 모습도 드러내지 않던 그는 미국과 서방 각 나라가 망명을 권고하며 항공편을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을 향해 “나에게 필요한 건 도망갈 항공편이 아니라 더 많은 탄약입니다.”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그 순간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호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6개월짜리 새내기 정치인이라고 핀잔을 받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있었다. 그는 NATO에 가입하겠다고 말해서 러시아를 자극하여 분란을 일으켰다고 말하지만, 그는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지금 사순절 기간을 지키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까지 주일을 빼고 40일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금식, 절제, 기도 습관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지상으로 추방된 죄인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를 주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백성으로 살기로 한 성도들이다. 그러나 세속에 물들어 다시 과음, 간음, 살인, 권력 투쟁, 편 가르기를 일삼는 속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회마다 사순절 기간에 오락을 금하고, 특별 새벽기도, 성경 통독, 성경 필사 등 각종 행사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회복을 돕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식이나 교회 행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유대의 바리새인이 율법을 지키듯 마치 교회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구원을 받은 양 노아의 방주에 앉아 물에 빠진 불신자를 불쌍히 여기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기독교 대학에 봉직하는 교수마저도 이제는 대학에서 예수를 믿는 학생을 거의 볼 수 없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감소한 것은 굳이 통계를 들추어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2021년 한국 갤럽통계로는 종교를 떠난 사람이 25%인데 그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54%)’, ‘실망해서(19%)’이고, 종교가 사회에 영향이 있다고 답한 종교인은 54%인데 무종교인의 답은 18%였다. 또한,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준다고 답한 개신교인은 80%인데 무종교인은 82%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 말은 부모는 기독교인인데 그 자녀는 교회를 떠난 사람이 많고 또 그 이유는 교회에 실망해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해외 선교는 미국을 제외하고 제일 많은 인원을 보낸다고 자랑하면서 진작 자기 자녀들의 수직적 신앙 전수는 못 한다는 뜻이다. 부모가 예수님 닮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4차원 산업혁명 시대이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로봇공학, 무인 운송 수단 등으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신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다시 쌓고 있는 때가 된 것이다. 인간은 되도록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주를 창조한 그분의 질서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께 도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다리던 70 문도처럼 성령의 강림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 제사장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코로나 19는 대형교회와 교회 성장만 꿈꾸는 교회의 잘못을 꾸짖는 하나님의 채찍이다. 문밖에 서서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면 순종하고 나가 예수님을 내 안에 영접하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면서 내 앞길을 인도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이다.
한국장로신문 2022년 4월 2일 특별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