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선희*김양재 목사 설교

곽선희 목사, 일본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21. 06:13

곽선희 목사, 일본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나의 관심정보

2011/09/21 06:07 수정 삭제

작성자: 성령충만땅에천국(joz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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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 목사, 일본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일본유니온신학대학에서 설교학 강의

▲교회성장의 방법과 실태 세미나(우하: 곽선희 목사)
▲세미나 수료자 단체사진(2열 좌측 세번째 운영이사장 이병호 목사,곽선희 목사)

지난 20일(월)부터 23일(목)까지 일본유니온신학대학(총장 신현균 목사)에서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원로목사)를 강사로 초청, '교회성장의 방법과 실태'라는 주제로 제5회 교회성장대학원 체험학습의 장이 열렸다.

곽 목사는 22일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복음적인 설교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며, "일본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설교가 지식에 호소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곽목사는 또한,"예배시간은 강의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강단으로 만들어버리는 목회자들이 간혹 있다"며, 이성에 치우지는 설교,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시험이라고 덧붙였다.

아래는 곽선희 목사의 강의 요약이다.

검증된 설교

설교할 때 철학, 심오한 이론을 이야기 하면 성도들이 설교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어려워 하지만 나의 경험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면 성도들이 설교에 집중한다. 설교의 주된 메시지는 내가 경험한 것. 즉 '검증된 진리'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를 들을 때 '저 분이 경험 속에서 하는 말' 이라고 하는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목사는 또한 자신의 경험의 세계를 넗혀나가야 한다. 경험이 '말씀의 인카네이션'의 재료가 된다. 경험 속에서 진리를 검증해 가면서 설교를 해야 한다. 자기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간증적 의미가 나오는 설교여야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경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떤 경험을 통해서 깨닫거나 체득하게된 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단순한 '동물적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검증된 진리로 설교를 전할 때 교인들이 감동을 받는다. 생활 속에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검증을 해 나가며 설교를 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이해시켰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게 했느냐'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신뢰는 '경험'이라는 바탕 아래 세워지는 것이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목사가 무슨 말을 하던지 성도가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계에서 설교가 성공할 수 있다.

창조적 설교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설교자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설교를 추구해나가야 한다. 스스로 계속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지금은 정보 포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정보의 성격 상 정보는 모두 낡은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는 또한 설교에 있어서 항상 창조적인 내용과 창조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경영학자 피터드러커의 명언이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거든 살려고 하지 말라.' 창조적 변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 밖에 오는 것이다. 예측을 넘어서는 변화를 말한다. 설교자는 시대를 바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번쩍'하는 창조적 아이디어가 아니면 안된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이에 적합한 방법과 내용을 도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영감있는 설교', '검증된 설교', '창조적인 새로운 설교'를 우리가 익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다. 습관은 바로 생활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반복화 되어 '체질화'가 된다. 특별히 목사는 설교가 습관화가 되어야 한다.

일본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는 원고를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신학의 영향을 일본신학이 받았고 일본의 신학를 나온 일본 목회자들은 원고를 그대로 읽으면서 설교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설교는 영감이 통하지가 않는다. 지금은 오디오 시대가 아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보고, 청중을 듣고, 청중에게 말하게 해야한다. 설교자는 예배의 중요한 연출가라고 할 수 있다. 눈빛, 손짓, 몸 전체를 가지고 설교해야한다. 전문적인 설교가로서의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이것들을 잘 습관화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예배로서의 설교

첫째, 설교는 강의가 아니고 예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설교가 제도화 되기가 쉽다. 바로 예배실을 강의실로 만드는 것. 즉, 지식에 호소하는 설교이다. 일본교회가 바로 여기에서 부딛힌 것이다. 머리 속에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것. 그러나 이것처럼 잘못된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한번도 성경지식이 많은 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지식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지식을 주면서 어떻게 보면 교인을 이상한 교인으로 만들고 있다. 이성적으로 설교를 끌고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래야 바른 믿음을 갖게된다. 성경공부와 설교라는 명목으로 이성을 교인들에게 부각, 의존, 예민하게 만드는 것. 일본교회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엔터테이먼트 설교. '가라오케적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은 성경적이고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이지 않고, 기독론적이지도 않은 영성이 바로 팝 스피리튜얼리티 (POP-Spirituaility, 보편적 영성) 이다. 자기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을 해서 성령을 받겠다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성은 '수단'이 아니다. 바로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엔터테인먼트화’한 예배를 많이 본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안에 기독론, 성령론이 없고 특별히 윤리성이 없다. 또 하나는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특징을 보인다. 그리하여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엑스타시에 도달한다. 바로 그 순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교회된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기복적 예배. 예배를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예배가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다. 복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를 통해서 예배하는 자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도해야 한다.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 이외의 복음은 없다.' 빵이 복음이 아니지만, 빵을 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문제에 부딛힌다. 예수님께 많은 병자들이 왔을 때, 사실 예수님은 병고치러 오신 것은 아니나 병을 고치셨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이 있는 목회이다. 우리가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세속적인 복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에서 종종 예수 믿으면 잘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원하는데로 성공한다는 등. 이런 것이 정말 성경적 메시지인가? 이것이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시험이다. 정말 바른 설교란 무엇인가. 예배로서의 설교이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도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기도응답으로서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예배 참석자의 고민에 응답. 그럴 때 바로 예배의 인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종일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음적 설교란 무엇인가. 3가지를 피해야 한다. △율법주의로부터의 해방. △철학적 사고를 마치 성경적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 △성과주의. 우리가 이세상에서 어떤 것을 해도 결론적인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보자. 계시록을 보면 오로지 순교자만을 높이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설교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축복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가면 안된다. '사랑하라'는 율법이고 '사랑은 귀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철학이다. 복음은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것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복음이지,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이다. 우리가 봉사하라는 말도 많이 한다. 설교 중에 이 말이 빠지는 때가 있는가?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얼마나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인가. 문제는 봉사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게 바른 설교이다. '봉사하라'는 말은 아주 무거운 짐이 된다. 그러니 교회 가고 싶지가 않고 불평을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른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미국의 전체교회의 설교에 대하여 조사하고 연구하여 보니 율법적 설교를 하는 곳이 전체의 85%로 집계되었다. 이것이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하나의 이유이다.

복음주의적인 설교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사람이 응답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주의가 아닌 메시지는 사람이 주도하고 하나님이 보상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잘못된 복음이다. 주동(主動)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주도하는가 하나님이 주도하는가. 사람이 주도하면 인본주의이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그야말로 율법주의이다. 많은 경우의 메시지가 사람이 주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복음주의자의 설교는 하나님이 주도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에 응답할 뿐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나는 겸손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응답하신다. 이것이 복음주의 설교의 총주제이다. 물론 성경에 율법적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라, 봉사하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복음성을 보아야 한다. 복음주의 설교를 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도 교회가 부흥한다. 문제는 목사의 설교가 복음주의적이기 아니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 답지않은 것에 있다.

내가 병들어서 그리스도께 나가면 그건 병이 은혜이다. 복음주의적 의미의 은혜는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모든 여건을 말한다. 바로 이런 의미의 설교를 해야한다. 한국에 IMF 한파가 닥쳐왔을 때, 기복주의적인 교회는 교인이 1/3로 줄고 헌금도 절반이 줄었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교회가 더욱 부흥하였다. 기복주의적인 교회는 그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가 더욱 하나님께 바로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교인들을 항상 어떻게 훈련시켰는가가 문제이다. 은혜란 결코 보상이 아니다. 소원성취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자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요3:16절을 소중히 여긴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는 이해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읽을 수 있다면 그 때부터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면 어디를 봐도 사랑이다. 목사의 시각이 여기에 도달해야 설교가 성공할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온다. 초신자 시절 마태복음 1장은 참 지루하게 느껴진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러나 어느날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계보의 다른 부분처럼 '누구 이름에서 낳고'가 아니다.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라고 나오고 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다.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볼 수가 있다. 목사는 성경을 보면서 사랑을 보아야 한다.

초점이 보상에 있는 설교. 보상을 고집하면 이것은 복음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상에 대해서 너무나 신경을 많이 쓰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의 촛점은 보상이 아니다. 단지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기도응답은 하나로 통한다고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것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주의자의 강조점이란 것은 내적존재에 있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 않고, 환경의 변화에 돌리지 않는다. 나 자신을 위해서. 예를 들어 말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아니다. '나로 하여금 내 남편을 사랑하게 해주세요'하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나를 움직여서 사랑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복음주의적 설교는 모든 것이 내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설교는 아웃사이드 월드, 바깥 세상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경제문제, 정치문제 등등. 열심히 기도하기는 기도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주의가 아니다. 그러한 많은 설교가 신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사회주의적인 장소가 아니다. 참으로 복음주의적 설교를 해야 한다. 복음주의의 최고의 텍스트 북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이다. 모든 것을 소진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그 탕자의 과거에 대해 전혀 묻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좋아.'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적 설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기 체험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요, 십자가는 능력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경험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능력을 체험한 목사야만이 설교를 할 수가 있다.

둘째, 구원하고자 하는 정열이 있어야 한다. 정열이란 일을 즐기는 마음이다. 목사는 목회를 즐겨야한다. 설교도 즐겨야 한다. 설교가 힘들어서 어떻게 하겠는가.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다름아닌 설교를 즐기는 것이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즐기는 데서 온다. 남의 것을 옮기는 것은 과거의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언제나 즐기는 마음에서 온다.

셋째, 모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은 좋은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코치는 말(馬)의 성격을 잘 안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때리지 않는다. 그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코치를 만난다는 것은 말로 볼 때는 성공의 비결이다. 시작에 좋은 코치를 못만났기에 나중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작에 좋은 코치를 만나면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목사가 목회나 공부를 시작할 때 처음에 패러다임을 잘못 만나면 안된다. 패러다임이 중요하다. 맨 처음부터 어떤 습관을 익히느냐가 중요하다. 시작이 잘못되면 참 힘들다. 설교와 목회에 있어서도 좋은 모델을 찾아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넷째, 청중으로 듣도록, 알도록, 결심하도록, 해결하도록, 그리고 감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이다. 이것이 다른 말로 '충만'이다. 모든 것이 다 채워지는 것이다. 목회할 때는 절대로 전체교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설교할 때도 1/10만 보며, 제일 열심히 듣는 사람만 보고 하라고 한다. 나의 지인이 8명의 아이를 낳았다. 양육이 참 힘들지 않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첫째가 둘째를 사랑해주고 챙기고, 둘째가 또 셋째를 사랑해주고 챙기고, 셋째가 넷째….를 사랑하고 키웁니다."이것이 바로 목회학이다.
설교 못하는 사람은 조는 사람를 상대로 설교한다. 자는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 그러면 절대로 안된다. 목소리만 커진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그것이 목사의 마음에 이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항상 그림을 그려야 한다. 예컨데 기도 많이 하는 교인, 헌금 많이 하는 교인 그것은 우등생이 아니다. 봉사 잘하는 교인.. 우등생이 아니다. 목사의 마음에 그림이 있어야 한다. 바로 언제나 행복한 교인. 항상 감사하는 교인. 부부생활, 직장생활에도 항상 행복해 하는 사람이다.

나의 목회철학은 '행복한 교인'이다. 행복한 교인을 만들려면 목회자 자신이 먼저 행복한 목회자가 되라 그럼 행복한 교인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다 합쳐서 인격적 목회라고 한다. 강의실에 앉아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다하여 목회를 하라. '전형적 현대인이 되라' 현대인이 가진 모든 문제에 내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들의 고민도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똑 같은 일에도 보는 눈이 참 다르다. 신앙적 시각이 있다. 다른 사람이 못보는 것을 본다.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항상 놀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목사와 평신도의 다른 점이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사람이 한 일로 본다. 목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본다. 태풍이 해변의 마을을 덮쳐서 사람들은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시작을 본다. 태풍이 지나간 해의 가을에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다른 사람은 태풍의 피해를 보지만 목사는 태풍후의 풍요를 본다. 이것이 목사이다.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을 보자. 그의 코치를 받아 가야한다. 좋은 코치는 말을 아주 선한 길로 인도한다. 왜냐면 그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목사는 신도가 어떤 문제, 어떤 말로 상처를 받는지 잘 알아야 한다. 그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행복하게 만들 책임이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내적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목회자들이 치료를 해야한다. 지금의 시대야 말로 정말 교회가 필요한 때이다. 교회는 지금이야말로 부흥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필요한 절대필요의 때에 왔다. 현대인의 고독, 심적 문제. 지금은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 수 밖에 없고 교회 없이는 살수 없는 때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물질부족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문제시되지 않는 때이다. 정신적인 문제가 문제이다. 다른 말로 가장 목회하기 쉬운 계절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Reporter   서진화  jhseo@ch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