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14강)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행 4:36-5:1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20

(제14강)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행 4:36-5:11)

 

  마13:24-30절을 보면 예수님의 천국비유 중에서 가라지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가라지 같은 존재가 있어 알곡 성도에게 신앙생활에 해를 입힐 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암시하는 비유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라지 같은 성도가 나타났습니다. 이 가라지는 구약의 광야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제일 먼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아이 성을 칠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간이라고 하는 가라지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노략 물을 감춘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심으로 아이 성에서의 싸움은 대패를 하고 맙니다(수7:1-13). 그러니까 아간 한 사람 때문에 광야교회에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 해도 가라지 성도가 섞여 있어 온 공동체가 괴롭힘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단락으로 서로 다른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4:36-37절에는 바나바의 온전한 헌신이 나오고, 그 다음 5:1-11절에는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알곡성도와 가라지 성도를 분별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바나바의 온전한 헌신을 대조시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조시켰습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밭에 뿌렸다고 해도 가라지는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집단이나 알곡이 있고 가라지는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선택하신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롯유다 같은 가라지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라지 비유에서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알곡과 가라지가 한 교회에서 자라고 있음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제목소개!▶

 

  먼저 4:36-37절에서 '바나바의 헌신'부터 알아보겠습니다.
  ▶36-37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레위지파 출신으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제사장지파로서 복음의 편견을 가진 유대인들의 큰 벽을 허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처음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권위자, 위로자, 권고자, 예언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 바나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름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앞일을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큰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으로 그는 이 섬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당시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마가 다락방의 주인인 마가와 고종사촌 형제였고,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70인의 제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다메섹에서 회개한 바울을 처음으로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었고,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다가 사울의 제1차 선교여행 때, 동행했는데 예루살렘 총회에도 바울과 같이 참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바나바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맡겼고, 어려운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행14:4절에 보면 그를 '사도'로 칭하였고, 바울도 고전9:6에서 그를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바나바의 신앙 인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보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도 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가의 정적인 다윗을 미워하기는커녕 마음을 주는 진정한 친구의 우정을 주었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를 만난 삭개오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돈보다는 믿음을 먼저 생각한 사람입니다.
  마19장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자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이 '모든 계명을 지켰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주님은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니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은 돈을 생각했지 믿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바나바는 '돈보다 먼저 믿음의 일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급속한 성장으로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 필요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행11:24절에 보면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①구제 사업에 힘썼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자와 노예들이 많았고, 재산이 많은 자들이 있었으나 핍박으로 인하여 재산을 강제로 몰수당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초대교회는 구제 사업이 큰 과제였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②믿음 충만,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행14: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는데 그곳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바울과 바나바를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는 '제우스신', 바울은 '헤메'신이라고 부르면서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들을 책망하고 그 같은 행위를 금했습니다.
  ③사람을 볼 줄 알았습니다.
  다메섹에서 부름 받아 회개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자기가 사도 됨을 선언할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었다고 자칭한 것은 어떤 술책에 지나지 않고 우리를 꾀어 적에게 넘기려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아니 엊그제만 해도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무수히 잡아 옥에 가뒀던 핍박 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니 전 성도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을 달리 봤습니다. 사람 보는 안목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바울을 변호했으며 바울에게 기회를 주면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세계 복음사역에 크게 기여할 사람이라고 극찬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을 바울 되게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④사람을 키울 줄 알았습니다.
  행15에 보면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 충돌 때도 적극적으로 마가를 변호했습니다. 1차전도 여행 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 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 그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마가에 대한 고백을 보면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 요한을 내게 보내주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⑤바나바는 이방인 선교에 앞장섰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땅에 제일 먼저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교역자로 파송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로 희랍인들을 비롯하여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바나바가 그곳에서 선교의 열정을 다했습니다. 한마디로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큰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⑥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부임한 그 날부터 안디옥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 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의 판단은 정통했습니다. 바나바의 천거로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바울은 바울 되기 위한 일터의 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1-2절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43절 이후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 5장으로 바나바와 대조적인 인물이 소개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바나바의 위대한 신앙 인격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무수한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한번 나타내 보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흉내내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들어 초대교회의 마귀의 공략이 시작되었다고 학자들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마귀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날마다 부흥되어 가는 초대교회를 그냥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고통을 당하게 하기 위하여 남달리 명예욕이 강하고 물질의 욕심이 많은 한 부부를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명예욕과 욕심을 신앙과 헌신으로 위장시켜서 접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를 통하여 이 음흉한 사탄의 계획을 미리 아시고 엄격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교회를 내적 위기에서 건져냈으며 오히려 그 일을 통하여 더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나타냄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열기를 심어주었습니다.

 

  ▶1-2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먼저 이름의 의미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이름의 의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아나니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자'이고 삽비라는 '보석처럼, 청옥처럼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보석이 있습니다. '사파이어'입니다. 바로 삽비라의 이름의 의미가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름의 의미대로 주님의 은혜 속에 살지 못했으며 주님 보시기에 신앙의 아름다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은혜를 파괴시키고 아름다운 믿음에 더러운 먹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은 아름다운데 그 마음은 하나님을 속이려고 부부가 공모하리만큼 악하고 추했습니다. 부부간에 머리를 맞대고 주님의 영광과 선한 일을 위하여 의논하고 힘을 합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 이름과는 맞지 않게 부부간에 이마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속이고 인간적인 명예와 칭찬을 얻을까하고 악을 도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①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적어도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
  바나바의 헌신 앞에 초대교회에서는 온통 바나바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한마디로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자신들도 바나바와 같이 인정을 받고 겉으로 크게 나타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신앙,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갈5:25-26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또 주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자들에게 마6: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②거짓된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자 한 동기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예물을 드리고자 하는 계획은 거짓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습니다.
  희생과 헌신도 없이 바나바와 같은 찬양을 받으려 하였고, 거짓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사람을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속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속인다는 사실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심판의 길로 가는 자초하는 길입니다. 두 부부가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의논해서 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두 부부가 의논하면서 하면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현금을 손에 쥐자 욕심이 생겼습니다. 아까운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부부가 이번에도 의논해서 그 돈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여기서 감추었다는 말은 '헬'어로 '노스피조'인데 이 말은 단순히 숨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착복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부부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약속하고 서원하고 일부를 감춘 것인데, 그 돈은 이미 자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착취한 것이 된 것입니다.
  ③이들 부부는 서로를 보완해 줄 좋은 짝이 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부부를 가리켜서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생활의 필요를 주고받는 일상적인 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돕는다는 말은 '정신적, 신앙적, 환경 적인 유익'까지 포함해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그 아내가 "여보 하나님 앞에 진실 합시다!" 라고 충고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삽비라는 알면서도 침묵해 버렸습니다.
  "여보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하나님을 봐야지요" 이렇게 따뜻하고 바른 충고를 할 수 있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면 그 부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땅을 판 돈 중에서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3절에 나와 있습니다.

 

  ▶3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성령을 속인 자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속였다는 말입니다. 처음 그들에게 준 마음은 성령의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준 마음은 사탄의 속삭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 받고 처음 주는 마음이 성령의 감동이요, 두 번째 주는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속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냐?" 사단이 네 마음속에 가득하다고 했는데 이는 사탄 충만을 뜻합니다. 즉 사탄의 '완전 지배, 완전 꾀임'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에 사탄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는 곳에 시험이 있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성령을 속인 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거짓말한 것은 베드로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속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교회를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세운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이 계신 곳입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한 것은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사람은 누구나 다 종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아나니아가 자신의 땅이라고 믿고 팔았던 그 땅도 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24:1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아멘!/
  원리 원칙으로 말하면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빈손 들고 나그네로 왔다가 때가 되면 빈 손 들고 가야합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것을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 것을 책망하자 아나니아의 혼이 떠났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아나니아가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선언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합하여 되었으며 영혼이 떠나면 죽게 됩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혼과 육신의 분리입니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원래 육신은 흙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어 지으셨습니다.
  '사람'이란 말의 '히'어 발음을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아!> 이것은 '사람아!'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뜻에 흙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고 숲 속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아담을 불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른 것은 근본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부른 것입니다. 아담아 부를 때마다 너는 근본적으로 비천한 흙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귀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룩하다 함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영혼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며,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는 그 영혼이 떠난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속인 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를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며, 생명운동을 대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

  ▶여기서 아나니아의 죽음은 세 가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 그의 죽음은 충격에 의한 심리적인 신경 쇼크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교회에 임재하신 성령께서 베드로의 선언을 통해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셋째, 이 일로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것과 어떠한 불의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었습니다.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①당시 현장에서 베드로의 선언을 듣고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②오늘날도 이 말씀을 접한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여러분! 성령을 속인 죄로 심판을 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여기 크게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교회에 임재 하셔서 죄악을 벌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결국 이 두려움은 ①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으며 ②교회에서는 모든 거짓과 위선적인 행동이 숨겨지거나 묵인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6절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우리가 이 사건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세상에 사람이 죽자마자 끌어다가 묻어버리다니' 하겠지만 유대 풍속에는 왕이나 민족의 큰 지도자가 아닐 때는 즉시 장사를 치르지 며칠 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기후 탓입니다.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쉽게 부패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우리와 다른 것이 나중에라도 가서 시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식구 중 못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식구가 올 동안 기다리기로 하는데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가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보자고 하셨을 때, 썩어서 냄새가 날 테인데도 가보자고 한 것은 시체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매고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젊은 사람은 나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특별한 직분을 의미하는 말로서 '장례를 맡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7절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세 시간의 간격은 언제부터일까요? 8절에서 장사를 마치고 오는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삽비라가 들어온 것을 볼 때, 아나니아가 죽은 후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삽비라는 자신의 남편이 사도들에게 무슨 큰 명예와 영광을 얻은 줄 알고, 자기도 그 영광에 동참할 생각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남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것을 알지 못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죽은 죄인의 경우에는 장례식도 거창하게 할 수 없고 애곡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의 장례는 조용히 신속하게 치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도 놀랬습니다.

 

  ▶8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그때 만일 삽비라가 양심을 똑바로 썼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삽비라는 그의 남편과 똑같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자신의 남편과 공모했기 때문에 양심을 쓰지 않고 역시 성령을 속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고 양심을 속이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십 대 소년 4명이 주일 날 어딘 가로 놀러 갔다가 월요일까지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께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고칠 수가 없어서 월요일에 학교에 못 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4명의 학생들을 불러놓고 '그래 너희들 말을 알겠다. 그런데 우리 반 전부가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너희들도 한 가지 시험을 꼭 치러야 한단다.' 그리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주면서 고장 난 타이어가 어느 쪽 바퀴였는가를 쓰라고 했습니다. 4명의 학생들은 서로 다른 바퀴를 적어 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거짓은 잠깐은 통할 수 있으나 영원히 통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9-10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너희가 어찌 함께 꾀어서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 두 부부가 연합하여 봉사하면 그야말로 귀한 일이지만 연합해서 죄를 지으면 죄가 더욱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삽비라에게도 똑같은 심판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과연 그만한 일에 그토록 엄격하게 처벌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는가?'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발적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거짓말 한 것은 잘못이었지만 연약한 인간성을 충분히 참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처단하셨습니다. 너무 심하신 처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 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강림으로 태어난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땀흘려 노력해서 발전하던 공동체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성령이 주도하시고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성령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거룩 성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 성을 해치는 중대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의도,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는 불 신앙적 사건이요, 불순종의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성령을 속이고'라고 했고 4절에서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함으로써 신앙공동체의 거룩 성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지나칠 정도로 손을 쓰셨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교회가 거룩 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인간 공동체처럼 죄로 물들고 인간의 욕망으로 범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도 중요하겠으나 하나님께는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의 거룩 성을 지켜야만 모든 교인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20장을 보면 므리바 물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 지역을 행군하고 있을 때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린 후에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그것도 두 번이나 내려치자 기적이 일어나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들이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민20:12절를 보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모세가 인간적인 혈기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거룩 성을 훼손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모세, 그토록 귀하게 쓰시던 모세까지도 하나님의 거룩 성을 훼손하면 용납하시지를 못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런 위선과 잘못된 헌신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교회는 사탄이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지없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11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크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효과를 말할 때 '각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 마치 돌에 글을 새겨놓는 것처럼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잡는 효과를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난로 위에 있는 주전자가 뜨겁다는 것을 배울 때, 엄마가 아무리 주전자는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라고 가르쳐주어도 잠시 기억하고 있다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직접 뜨거운 주전자를 만져보면 상황이 다릅니다. 손이 델 정도로 뜨거운 것을 체험해 보고, 그것 때문에 눈물을 쏙 빼고 나면 주전자처럼 생긴 것만 봐도 '앗 뜨거' 하면서 손을 듭니다. 이 때 이 경험은 평생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각인 효과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은 죽을 때까지 이 사건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는 교회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헌금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함부로 대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순종하며 성령의 역사에 헌신적으로 참여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철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한번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쉽게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로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믿/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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