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36강) 박해자 헤롯의 죽움! (행 12:13-2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30

(제36강)     박해자 헤롯의 죽음! (행 12:13-25)

 

  초대교회에 큰 핍박이 왔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했는데 맨 먼저 표적이 된 인물이 바로 사도 '야고보'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 큰 야고보로 불리던 야고보가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평신도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야고보는 사도 중에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를 처형하니까 유대인들이 헤롯의 정치적 인기가 높아져 갔습니다. 야고보는 칼에 죽었는데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했습니다. 대중인기가 급상승한 것입니다. 이에 헤롯은 여세를 몰아 기독교의 대사부인 베드로까지 목을 치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안정되리라고 믿고 드디어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왜 옥에 가두었느냐 하면 그때가 유월절 다음 무교절이라 절기 때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무교절이 끝나는 날 기술적으로 시간을 배정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온 유대인들에게 결정적인 인기몰이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감옥에 넣고는 엄중한 경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다가 감옥에 갔었는데 그 이튿날 재판하려고 감옥 문을 열어봤더니 사도들이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옥문을 열어준 사람도 없는데 그들이 다 나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믿/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베드로의 양손을 꼭 묶어 버렸습니다. 당시 보통 죄인은 죄수의 오른 손과 보초병의 왼손을 묶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손을 꼭 묶어 버리고 삼엄한 경비를 세웠는데 네 개의 부대가 그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1개조가 4명씩이니까 16명이 지키고 있었고, 1교대 근무교대 시간이 3시간씩이었으며 많은 군대가 베드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탈출이라고는 엄두도 못할 뿐 아니라 연약한 주의 제자들이 베드로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베드로는 깊이 잠을 잡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내일의 운명과 앞날을 다 주님께 맡기고 평안히 잠을 잔 것입니다.
  시3:5-6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붙드시니 원수들이 둘러싼 옥중에서도 안심하고 있었고, 여호와께서 잠을 주시니 무서운 죽음을 앞두고도 평안히 잠을 자는 줄 믿습니다. /아멘!/
  한편 초대교회에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교회는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외상이 없고 공짜가 없습니다.
  7절에 보면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할/ 한마디로 교회에서 성도들이 믿음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천사를 보내어 인도해내신 것입니다. /믿/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는 사람의 할 일을 다하고 난 뒤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입니다. 기도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잘못입니다. 오늘도 기도하면 '스스로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때로는 문이 닫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이 잘 안될 때 '문이 막혔다'고 표현합니다. 직장취업도 문으로 표현합니다. 취업의 문이 비좁다고 표현합니다. 입시도 문으로 표현합니다. 장래의 일도 문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적인 모든 문들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온 뒤에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았듯이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감금한 감옥도 철저하게 닫혀진 문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타에 의하여 문이 닫혀진 경우입니다.
  ▶닫혀진 문들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첨단 기술로 은행 문이나 차고 혹은 대문도 자동으로 열립니다. 차나 사람이 다가가면 저절로 열립니다. 처음 당하는 사람은 놀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의 베드로가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내일이면 처형될 사람이지만 편안히 잠잘 수 있는 은혜를 받았는데 천사가 급히 깨웁니다. 여기서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입니다. 9절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참인지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10절에는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지나 쇠문에 이르렀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닫혀진 마음을 열기도 하십니다(창33). 눈을 열기도 하십니다. 이스마엘을 데리고 나온 하갈과 발람과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창21:19/민22:31/왕하6:17). 또 하늘의 창을 여시고 물질의 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셨고, 이삭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셨으며,  야곱의 길을 여시고, 요셉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길도 여시고 인도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우리 모두 만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인생의 삶과 국가의 흥망성쇠의 모든 문을 닫고 여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이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합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은혜를 입고 능력을 입으면 열지 못할 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마음도 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장의 문도 여십니다. 장래의 문도 여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는 말씀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키시되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그런 방법으로 하셨고, 그것도 내일 죽을 것인데 오늘 밤 극적인 탈출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감옥을 나온 베드로는 제일 먼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갔는데 성도들이 그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늘은 13-25절까지의 내용을 ◀박해자 헤롯의 죽움!▶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3절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가 지금 누구의 집에 갔습니까? 마가의 요한의 집에 가서 대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때는 주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말씀을 배웠습니다.
  여기 '대문'은 행랑의 대문 또는 궁전의 대문을 의미하는 원어로서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그 집이 상당히 큰 규모의 집인 것이 분명합니다. '대문을 잠겨' 놓은 것은 일상적 일수도 있으나 당시 헤롯의 박해가 심해서 닫아 놓았던 것입니다.
  여기 '로데'라는 계집아이는 '장미'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처녀로서 그 집의 문간방에 거하면서 손님이 왔을 때, 문을 열어주는 하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유대지방에서는 계집아이가 문을 지키는 일을 많이 하는데 로데라는 처녀가 대문 소리가 나서 손님을 영접하러 나간 것입니다.

 

  ▶14절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아마 로데가 가서 문 두드리는 사람에게 '누구십니까?' 물었더니 그 음성이 베드로의 음성임을 알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나다, 문 열어라' 하는 소리가 바로 베드로라는 것을 알고 이 소녀는 순간 '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구나!' 확신이 왔을 것입니다.
  왜? 밤새도록 베드로 사도가 풀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문을 미쳐 열어 놓지도 않고 도로 안쪽으로 달려가 지금 베드로가 대문에 왔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로데가 너무 기뻐서 문 여는 것조차 잊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즉 그녀의 행동은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다니리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15절에서 로데의 증언을 듣더니 '미쳤다'는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그 집에 모인 성도들은 사도 야고보가 순교 당하고 베드로마저 감옥에 잡히자 자신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되었으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베드로가 나왔다고 하니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입니다.

 

  ▶15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대문 밖에 왔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환경을 바라보고 확신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얼마나 이런 불 신앙에 빠집니까? 실컷 기도해 놓고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냥 기도는 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 없이 드린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21: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할/  
  믿음 없이 드린 기도는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금 초대교회 마가 다락방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간 날부터 모여 열심히 기도해 놓고 로데라는 처녀가 베드로가 나왔다고 하자 오히려 미쳤다고 합니다.
  지금 누가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베드로가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돌아왔다고 하는 계집아이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을 말하면 미쳤다고 합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 사건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웃기는 소리라고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믿어지는 믿음 주신 것이 기적입니다. /할/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앙망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아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여기 '힘써 말하되'란 이 표현은 당시 성도들의 부정적인 믿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로데가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강조하면 강조한 만큼 성도들의 부정적인 믿음도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조금 양보하여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그의 천사'란 말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그 당시 각 개인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가 찾아와 베드로의 죽음을 전해주신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기가 기도한 것을 믿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기도를 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도한 것을 믿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믿/
  어느 한 동네에 가뭄이 극심했습니다. 온 동네가 목이 말라 농작물이 다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우제를 드리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동네에 있는 교회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목사님의 가정에서도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목사님이 심방을 가려고 하는데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목사님에게 우산을 건네줍니다. 목사님은 '예야! 이렇게 날이 맑은데 무슨 우산이냐?' 그러자 손자가 '할아버지 지금 비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잖아요' 그렇습니다. 어린 손자는 순수해서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

 

  ▶16절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기 문을 두드리는 것을 그치지 아니했다고 한 배경을 학자들은 당시 상황의 긴박성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베드로가 급히 교우들에게 얼굴을 보이고 그들에게 당부하고 다른 것으로 떠날 시간적 여유가 급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지금쯤 감옥 안에서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헤롯이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잡으러 올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급히 행동한 것입니다.
  한편 안에서는 계속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이번에는 로데 혼자서 나오지 않고 많은 교우들이 함께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자 베드로가 분명합니다. 얼마나 반갑고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로데라는 처녀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로데는 자신의 진실을 계속 전했습니다. 우리도 진리의 복음을 전할 때 비록 듣는 사람들이 그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미쳤다고 욕을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 증거 해야 합니다. 복음을 쉬지 않고 계속 증거하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성공과 승리의 날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17절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교우들이 베드로를 보고 너무 기뻐서 할렐루야! 환호성을 울리고 손뼉을 치며 소란을 피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쉿 조용' 하면서 손짓까지 하니 조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의 탈출이 헤롯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탈출을 보면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아직 관가에는 베드로의 탈출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또 다시 체포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교우들을 진정시킨 뒤 '주께서 자신을 옥에서 이끌어 내신 기적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도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 다른 곳으로 급히 떠났습니다.
  여기 야고보는 12사도 중 하나인 알패오의 야고보라는 설도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작은 야고보는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언급한 인물은 당시 지명도가 높은 유명인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을 맡게 된 주의 동생 야고보가 틀림없습니다. 주의 동생 야고보는 한 때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때로는 비난도 했습니다(요7:2-5).
  그의 변화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가 확실히 깨닫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믿고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성화 되었는지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 야고보의 얼굴만 보아도 은혜가 되는 그런 단계까지 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갔느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대게는 안디옥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헤롯이 죽은 후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오게 됩니다(15:7).

 

  ▶18절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베드로의 이야기는 마가의 다락방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감으로서 일단락 되고 여기서의 이야기는 뒷마무리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날이 새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탈출 사건은 간밤에 감쪽같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군사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베드로가 온데간데없이 없어졌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여기 '소동하니'란 말은 어떤 문제로 인해 야단법석이 된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근무 교대시간에 와보니 죄수가 없어진 줄 알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직속상관을 통해서 헤롯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19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헤롯이 직접 감방 안을 뒤졌는지 아니면 그의 심복들이 뒤졌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헤롯이 팔 벗고 나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베드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이제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고 명합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간수가 죄수를 놓쳤을 때에는 죄수가 받아야 할 형량을 간수들이 대신 받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형수였기 때문에 그를 지키던 간수들은 대신하여 사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을 눈으로, 이는 이로'란 법이 여기서도 적용된 것 같습니다. 예수 때문에 죽이고자 했던 베드로는 살게 되었고, 오히려 베드로를 죽이려고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헤롯왕은 베드로를 죽여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약 104Km 떨어진 팔레스틴 해안에 위치한 로마군의 주둔지였습니다.
  고넬료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기가 다 끝난 상황이므로 헤롯이 내려가 그의 관저 내에서 쉬고자 했던 것입니다. 헤롯이 가이사랴에 내려감으로 베드로의 박해는 일단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한편 가이사랴는 예루살렘보다 북서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다'로 표현한 것은 위치의 표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 '올라간다'로 표현하고, 반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방향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내려간다.'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20절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이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로서 장사하는 곳입니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므로 양식은 유대지역에서 사다 먹었습니다. 이 지역은 베니게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써 헤롯의 관할이 아니고 수리아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그 지방 사람들과 충돌이 생겨 대단히 격노하고 그래서 그 지방에 양식 공급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미국이 이북이나 이라크 같은 나라에 경제 제재를 한 것처럼 그만큼 헤롯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등뒤에 로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 지방이 대단히 궁핍을 당하여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식을 헤롯 관할에서 사다 먹어야 되기 때문에 화친하고자 빌려와서는 왕의 침소 맡은 사람, 그러니까 왕의 잠자리를 맡은 사람으로 왕과 가장 가까운 비서인 '블라스도'라는 사람과 친하여 뇌물을 먹이고 해서 어떻게 하든지 헤롯의 마음을 돌려 가지고 우리 지방에 양식을 팔도록 살살 빌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세력이 약하면 가난한 자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통례입니다. 여기서 보면 헤롯의 권위가 더욱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큰 악을 행한 헤롯이 높아지는 것 같고, 잘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내버려두는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잘못했을 때, 징계가 나타나고 채찍이 나타나는 것은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고쳐서 복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할/

 

  ▶21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헤롯이 날을 택하여' 이 날이 과연 언제였을까요? 이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제가 있었습니다. 축제는 여러 날 계속되는데 그 둘째 날입니다. 헤롯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글라우디오를 즐겁게 하겠다고 가이사랴에서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거기 주둔하고 있던 많은 로마군인들을 초청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는데, 로마 황제가 그 자리에 없으니까 결국은 자기가 황제처럼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잔치라지만 결국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만든 찬란한 옷을 입고 상석에 앉아서 뭇시선으로부터 영광을 누렸던 것입니다. 여기 '효유'한다는 말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22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이 때를 타서 왕의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헤롯이 일장 연설하고 난 후에 아첨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이 소리가 아니라'고 외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저들이 아그립바를 향하여 '당신을 이제부터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신으로 섬기겠습니다.'
  여기 백성들은 유대 백성들이 아니고 '두로의 시돈'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헤롯의 연설을 듣고 '신의 소리'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아첨하는 말입니다. 그래야 양식을 살 수 있었으니 '아! 위대하신 헤롯왕이요! 그대는 살아 있는 신'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들은 이와 같이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에게 아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합니다. 이때 헤롯이 철이 좀 들었다면 '내가 무슨 신이란 말인가? 절대 그런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어야 되는데 아마도 그 소리를 듣고 교만에 빠진 것 같습니다.

 

  ▶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를 말합니다. 그는 백성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대단한 화술도 갖추었습니다. 예수님도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들과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는 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영적인 축복까지 받을 수만 있었다면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영적 거목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세상만 크게 보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크게 보였습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영주 자리가 가장 소중해 보였습니다. 그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나 했습니다. 
  친 유대교적인 정책이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죽던 A.D. 44년경까지도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 그는 직접 박해에 나서 사도 야고보를 처형시키자 그의 행동에 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박수를 치고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론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에게도 손을 뻗쳤습니다. 베드로가 수제자 역할을 했으므로 베드로까지 죽이게 되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더욱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잘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 때 그가 깨닫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본절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신은 한 분, 여호와이십니다. 백성들이 자기를 신으로 추겨 세우자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행14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그들을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일제 때에도 일제 천황은 자신을 신으로 말했습니다. 2차 대전 종말에 '맥아더' 장군이 일제 천황에게 항복을 받을 때에 '나는 신에게 항복을 받을 수 없으니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요, 사람이라고 공포한 후에야 항복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천황이 할 수 없어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공포한 후에 항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일본도 천황을 신이라고 하다가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신의 자리에 앉아서 신의 대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믿/
  말2:2절에 보면 '내 이름을 영화롭게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 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 한번 깜박하시면 역사가 바뀌어 집니다. /믿/ 아무리 헤롯이 까불어도 하나님 앞에는 게임이 안 됩니다.
  교회를 핍박한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보십시오, 누가는 이 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헤롯을 멸망시킨 도구는 충에 불과하였습니다. '충이 먹어 죽으니라'는 말은 '그는 충에게 먹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충에게 먹히어 살이 썩었고 마침내 썩은 나무토막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시체가 땅에 묻히면 버러지가 먹어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헤롯의 몸은 아직 살아서 썩기 시작하였고, 이내 충이 먹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살고, 천년 살면 무얼 합니까?'
  헤롯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요, ▶그가 복음 전파를 방해했기 때문이며, ▶자신이 심고 거두는 법칙대로 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의한 중에 형통하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 일이 잘되고, 장사가 잘되고, 잘살게 되거든 망조가 가까운 징조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든 오히려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헤롯의 죽음을 통하여 말씀 전파를 막는 것은 자신의 앞길을 파괴하는 행위임을 알고, 더 분발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야 되겠습니다. /아멘!/
  이처럼 교회의 박해자인 헤롯이 죽자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24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여기 헤롯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안디옥 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헤롯과 같이 세상 적으로 잘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재물도 풍요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적으로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적으로 볼 때에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디옥의 시민들이 그들을 보니,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생활양식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고후6:9절 이하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들만큼 근심거리가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싶은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핍박 후에도 교회는 더 더욱 부흥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흥왕'은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25절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 오니라"
  본문의 문맥 상 11:30절과 직접 연결되는 말씀인데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야고보의 순교의 사건이 있었고, 베드로의 구출사건과 헤롯왕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고보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탁으로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갈 때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왜 데리고 갔습니까? 훈련 시켜서 주의 제자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의 제자 삼는 운동입니다. 제자는 '훈련시켜 다듬어진 사람'들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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