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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또 다른 성숙의 통로입니다! (시 119:67-72)
우리나라는 참 고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지형적으로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큰 나라에 둘러싸인 작은 반도국가로서 주변 강대국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어온 나라입니다. 당나라가 침략했고 거란족이 가난한 백성들의 가진 것을 다 빼앗아갔고, 몽고의 말발굽에 짓밟히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8년 동안 '조선은 형언 못할 궁극에, 가장 비참한 고통 속에 빠졌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생명만 해도 수를 알 수가 없고 사람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기아와 질병이 겸하여 왔고 인민이 모두 유리하게 되었다. 산하의 초근목피도 다 뜯어먹어서 없어졌고 주검이 들에 널려있었다. 서울서는 수구문 외에(동서남북 성문)내다 버리는 시체가 산같이 쌓여 그 시체의 높이가 성 높이 보다 더 하기 수장이나 하였고 그를 처분하는데 여러 해가 지났고 사람이 죽어 넘어짐에 그 살을 서로 다투어 뜯어먹었다.'고 그 당시의 처참함을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고난을 오랫동안 겪어왔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융성한 때는 고구려 때인 것 같습니다. 저 북방까지 영토를 넓히며 한국 사람의 기상을 크게 드러내었습니다. 그 때를 제외하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민족끼리 남북으로 갈라진 국가로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록했던 사가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사람을 왜놈이라 부르고, 중국 사람들을 오랑캐라 하며 무시했는데 우리가 그렇게 무시한 그 사람들에게 찢기고 뺏기고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남을 비웃기만 했지 우리끼리 싸우느라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동인과 서인으로, 남인과 북인으로, 소인과 대인으로 갈라지고 사분오열된 우리나라는 계속된 내분으로 외침을 감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한반도의 북쪽에는 도와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수치요,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본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장으로 무려 197절이나 됩니다. 본 시는 시편 중에서 문체가 찬란하고 빛나는 명구들이 많다 해서 '시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본 시편의 주제가 '여호와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본 시편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의 법이나 율법 그리고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67절과 71절은 본 시편 중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할/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숱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고 경험하다 보면 그 고난들을 통해서 깊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좋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참 어렵고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고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고난을 해석하는 기준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고난은 또 다른 교훈과 깨달음을 갖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깨달음의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이루게 하십니다. /아멘!/ ◀제목 소개!▶
'인생은 고난 백화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백화점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는 것처럼 인생 길에는 많고 다양한 고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한번 세상을 진지하게 들어다 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행복보다는 불행이, 형통보다는 고난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를 기본으로 해서 8고니, 16고니. 32고니, 64고니, 128고 등의 여러 가지 고난을 풀어나가는 고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욥5: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무슨 말씀인가? 인생이 고난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야기이고, 불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생 길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그런 논리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에 대한 이해가 절대 필요합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가 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갈등이 우리들의 신앙을 침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 안에서도 고난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난의 대명사는 욥이 당한 고난입니다. 왜 세상에 고통이 있을까요? 왜 세상에는 질병과 지진, 전쟁, 굶주림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악을 다스리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욥기서의 주요관심사는 고통이나 고난의 문제가 아닙니다. 욥기서는 잠언, 전도서 함께 지혜 서에 속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지혜서는 주장합니다. 잠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또 욥28:28절에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할/
①고난의 대명사로 불리는 욥의 고난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욥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인물들을 평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단 앞에서 두 번이나 칭찬한 사람은 욥 밖에 없습니다. 욥1:8절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또 욥2:3절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은 욥의 인격을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하십니다. 또 그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순전하고 정직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그의 마음가짐이 시종일관 순수했다'는 뜻입니다. ⑵그렇다면 이런 욥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욥이 당한 고난은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자식 열 명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건강한 욥이 갑자기 발바닥으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생겨, 너무나 괴로워 그 몸에 재를 뿌리고 기와 조각으로 온 몸을 북북 굵고 있을 때, 조강지처인 아내가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⑶우리가 욥의 고난을 통해 배울 교훈은 그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욥1: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공수래공수거의 인생을 고백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간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욥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유명 디자이너도 관속에 들어갈 때도 수의 한 벌이면 족합니다. 재벌 총수도 수의 한 벌 밖에 걸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욥의 고백대로 알몸 인생입니다. /믿/ 우리가 어머니 배속에 나왔을 때에도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갑니다. 이 땅에 가진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 놓고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주어도 감사하고 없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 비참하고 가난할 때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난할 때도 범죄하지 않습니다. 자기 본래의 모습은 빈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다가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잃어버렸다고 절망하고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원래 가진 자 인줄 압니다. 원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임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 고백이야말로 알몸 인생 고백보다 더 위대한 고백이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은 가지면 타락하고 방탕하고 죄를 짓습니다. 또 빼앗기면 원망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앙심을 품고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욥은 가졌을 때도 전혀 죄를 짓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가져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청지기의 마음으로 겸손했습니다. 또한 빼앗겨도 하나님이 가져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탄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전5:15절에서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알몸으로 낳고 알몸으로 죽었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인간의 온갖 탐욕과 탐심에서 해방 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믿/ 또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이 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세계와 역사와 인생과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믿/ 그분은 주실 수도 있고,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가져가시겠다고 할 때, '안됩니다, 이것만은 안 됩니다',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의지나 결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고난과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욥의 찬송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재산이 불타고 자식들이 참변을 당하고, 자신은 병들고, 아내는 곁을 떠나는 처절한 고난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찬양의 정신입니다. /할/ 여러분!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우리는 이것만은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이라도,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인 들은 환경 따라, 경우 따라, 신앙을 바꾸고, 감정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아멘!/ ⑷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유를 모르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일수록 이유를 모르는 고난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유가 있는 고난입니다. 왜 하나님이 욥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욥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이 욥도 그런 차원에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할/ 고난을 이긴 욥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욥42:12-13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 약대 육천, 소 일천 겨리, 암나귀 일 천을 두었고, 아들 딸 십 남매를 하나님께 욥에게 주셨는데 그 자녀는 전국에서 제일 아리따운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잘 지킨 욥을 축복해 주셔서 처음 복보다 나중이 더 좋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종교입니다. /믿/ 일단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수지맞습니다. 약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할/ '로저스'는 '하나님은 우리가 견디어 내는가를 시험하시고, 마귀는 우리가 고꾸라지는지를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욥이 고꾸라지는지를 보고 싶은 것이고 하나님은 욥이 견디어낼 것을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대설교가 '스펄존'은 '하나님이 그 자녀를 풀무에 던지실 때는 하나님도 그 안에 같이 들어가신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에 던졌는데 느부갓네살이 본 것은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신의 아들이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깨달아야 한 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난 어떠한 고난도 신앙으로 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게 유익이 됩니다. 오늘 본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리고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할/ 욥42: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다윗도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할/ 교회의 고난도, 개인 적인 삶의 고난도, 우리 모두 참고, 이기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난이 우리에게 신앙의 성숙을 주기 때문입니다. /믿/
②고난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⑴죄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5대 축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사람을 저주하시며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 죄가 유전이 되었고 인간의 원죄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할/ ⑵연단을 목적으로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옛날 대장간에서는 단단한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연단 했습니다. 불에 넣어서 달구고 꺼내서 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리고 물에 넣어서 식히고 다시 불어넣었다가 꺼내서 또 두들깁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단단한 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연단 하시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연만하셔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욥23:10절에 욥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 고난의 과정을 잘 통과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냅시다. /할/ ⑶과정으로서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에 앉게 하시므로 7년 대 흉년을 예비케 하고 그로 말미암아 히브리인들을 보호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혈통을 보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 가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자색 옷을 입고 왕자처럼 살기도 했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종으로 팔려서 종살이도 했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해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밑에서 지냈던 것이나 종살이, 옥살이는 총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그를 종살이하던 순간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 옥살이하던 순간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면서 그를 판단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푸른 초장도 통과하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푸른 초장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눈물도 아픔도 고난도 없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믿/ ⑷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다시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다. 요셉은 타인 때문에 무서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자기와 무관했습니다. 주변 환경 때문에 그리고 타인들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아서 감옥에 갔는데 그것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표현은 없지만 그때 요셉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의 역사를 이루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할/ ⑸사명을 버림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명을 버리고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인생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할/ 그런데 사명을 버림으로 당하는 고난은 사명을 회복하면 사라집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명대로 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시므로 음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멘!/ ⑹연대책임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데 그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면 나도 그 어려움을 함께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대책임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유대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유대의 멸망은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으로 인한 고난은 불의한 자들만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며 중보 하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경건했던 사람이지만 유다가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경건한 예레미야도 그 당시 불의 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앞차 운전자가 잘못 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는데 뒤따라가던 내가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부당한 고난이지만 지구 공동체에 함께 속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으면 아빠만 물질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도, 아이들도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할/ ⑺이유를 모르고 겪는 고난도 있습니다. 벧전2: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러니까 애매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실제로 이런 고난이 참 많습니다. 지난 IMF 경제위기 때 아무 잘못도 없이 직장에서 정리해고 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경제 책임 담당자들의 판단착오와 실수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난 미국의 9.11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습니다. 수천 명이 졸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족들 수만 명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저들은 그저 열심히 출근해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감당키 힘든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할/ ⑻자업자득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스스로 그 결과를 받는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은 대로 거둔 결과입니다. 갈6: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많은 경우 자업자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받고 있는 오늘의 고난은 대부분 우리들 스스로가 만든 고난입니다. 판단을 잘못 했거나 과정이나 생각이 잘못 되어서 주어진 고난들입니다. 아니면 탐욕 때문에 그리고 부주의하거나 과욕 때문에 발생한 고난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을 것입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피라미드 계에 빠져서 재산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만 재산을 잃으면 괜찮은데 남의 돈까지 끌어들이고 남들까지 끌어들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습니다. 판단 잘못으로 자신이 만든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는 고난들은 대부분 자신이 저지른 것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들입니다. 누구 탓할 일 아닙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는 그런 기도를 할 염치도 없는 고난들입니다. 야곱이 처가에서 20년 동안 종살이를 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주어진 고난입니다. 순전히 탐욕 때문에 주어진 고난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도피해 처가로 가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것은 노예생활이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도 또 속였고 또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연속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까? 후에 애굽에 가서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 자기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그는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큰 문제들을 푸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야곱은 그 문제를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서 해결합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 방법은 방법이나 수단이나 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얍복강 방법으로 즉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을 두고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것도 아닙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저지른 죄 때문이고 탐욕 때문이고 부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풀어야 합니다. 무슨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가 하면 얍복강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매달리고 내 잘못을 고하고 내 탐욕을 탓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였음을 회개하고 야곱이 죽도록 매달려 푼 것처럼 매달림으로 풀어야 합니다. 야곱은 기왕 고난을 받았고 내가 만들었든 속였든 그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들을 합동해서 유익하도록 방향을 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그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변화를 받았고 마침내는 탐욕의 사람인 야곱이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4명의 아내를 얻었고 4배의 복을 받았고 12아들을 얻어 나중에는 12지파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의 뼈대를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의 실수를 하나님은 그것도 활용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실수를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를 추행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 여인으로부터 임신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편을 전쟁터에 내 보내 무참하게 죽게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소행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이십니다. 죄에 대한 보응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무섭게 보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그 여인의 몸에서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전무후무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분입니다. 베드로는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가룟 유다 못지 않은 죄를 저지릅니다. 회복 불능수준으로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수를 통해서 강력한 베드로를 만드십니다. 베드로는 그 실수를 통해서 성숙하게 되고 거듭나게 되고 마침내는 말 그대로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성숙해진 베드로가 마침내 벧전 4장에서 담대하게 증언하기를 '예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불같은 시험을 걱정하지 말라,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때 주의 영이 함께 하시리라'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난의 신학을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할/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는 예수님께 너무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은 그렇게까지 악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악했던 사울이 마침내 주님을 만납니다. 만나서 알고 보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그 길로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침묵하며 자신을 연단시킵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외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전력 때문에 더 충성했고 그래서 그의 사역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은 살아가다가 실수하고 역부족을 느끼고 실패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역부족이나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일을 열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의 부족이나 못생김 그리고 무능이나 무지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조차도 장점이고 하나님이 활용하시는 자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대로가 좋습니다'라고 늘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멘!/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니 집사가 되고 또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장로가 되었지만 끊지 못한 것이 하나가 있었는데 담배입니다. 담배 핀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로서 구실을 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끊으려고 노력을 해도 담배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분이 몰래 담배를 피는 가장 좋은 장소가 화장실입니다. 옛날 화장실에는 구더기가 많으니까 여름에는 거기다가 석유를 한 번씩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휘발유를 한 통 뿌렸습니다. 그걸 모르는 장로님이 그 날도 몰래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해괴망측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더랍니다. '하나님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르더랍니다. 이 장로님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담배를 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할/
③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분명한 약속 몇 가지를 주십니다. ⑴고난 중에도 인내하고 기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약5: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할/ 욥은 끈질기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원망 없이 인내하는 중에 결국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셨고, 욥은 과거보다 큰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온갖 시험을 인내로 참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약1: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기쁘게 맞이하는 그 자세 앞에 승리의 생활이 분명히 있습니다. /할/ ⑵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성경에는 여러 번 약속했습니다. 사43: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할/ 물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불을 건너는 것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큰 시련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시121:3절과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이 약속을 절대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⑶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감당할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또 고난 중에서도 능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뿐입니까? ⑷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30: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욥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다시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고난도 거두어 가시고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라고 했습니다. /할/ ⑸현재의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롬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나중에는 넘치도록 위로하시고, 넘치도록 보상하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⑹고난에 참예하는 자는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신하의 아내가 유산을 한 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만 생각한다는 소식을 여왕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그녀를 방문한 이후 여인이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기자가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주었냐?'고 물자 그 여인은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만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런데 그 한마디의 말은 과거에 여왕도 유산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여왕도 과거에 유산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고난이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고난의 아픔이 물러가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우리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예하게 됩니다. 슬픔 속에서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소망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고후1: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할/ 여기 '위로하사' 의 원어 '파라칼론'은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을 뜻합니다. 즉 연속되는 환난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고난에 참예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No Cross, No Crown'입니다. 즉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상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찾아오면 상급이 있음을 알고 그 고난을 잘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아멘!/
④고난이 주는 유익도 있습니다. ⑴고난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나는 배고파 보았기 때문에 배고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헐벗어 보았기 때문에 헐벗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의 체험이 있는 자는 고난을 이깁니다. 더위는 더위를 이깁니다. 더위 속에서 산 사람은 더위를 이깁니다. 추위 속에서 산 사람은 추위를 이깁니다. 어떤 나라는 영상 1-2도에서도 얼어죽는 나라가 있습니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추위를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견디지 못해서 얼어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위도 경험하고 추위도 경험하니까 어디다 갖다놔도 끄떡없습니다. 고난은 고난을 이깁니다. 롬5: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을성이 없습니다. 더운 것도 못 참고, 배고픈 것도 못 참고, 힘든 것을 못 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고파 본 일이 없기 때문이고, 힘든 일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을 경험해 본 사람은 힘든 일을 잘 합니다. 아파 본 사람은 아픔을 이기고, 슬픔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을 이깁니다. 이렇듯 고난 당해 본 자는 고난을 이깁니다. /아멘!/ ⑵고난은 삶의 참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한 번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음식의 그 맛을 알게 됩니다. 매일 좋은 음식을 먹으면 그 좋은 음식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음식의 참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 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파 본 사람은 건강할 때의 축복을 압니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실패한 사람은 성공의 축복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생의 가치도 고난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고난 속에서 참 삶의 가치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고백을 했습니다(롬8:18). /아멘!/ ⑤어떻게 고난을 이길 것인가? ⑴견뎌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지어진 고난을 남김없이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끝까지 잘 견뎌내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뎌내신 주님께서 마24:13절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긴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할/ ⑵기도해야 합니다. 약5:13절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고난의 한 복판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고난에 넘어져 그 고난 때문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인간적으로 빨리 고난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권능이 바로 고난을 견디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이 능력을 받아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멘!/ ⑶기뻐해야 합니다. 벧전4:13절에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왜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이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위로하시고 회복해 주실 뿐 아니라 더 큰 것은 저 하늘에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눅6: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할/ 그렇습니다. 'No Cross! No Crown'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상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상을 바라보면 고난 중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이 또 다른 신앙의 성숙의 통로임을 깨닫고 이기고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2년 2월 12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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